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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실 Sep 19. 2023

범람 혹은 발견

그곳이 참하

  

구멍의 세계

                   고훈실     

불에 그을린 돌이 

구멍까지 첨부했다     

까칠했던 시간과

무한천공 사이에서 여자들

바닷속으로 자맥질한다     

구멍은 구멍을 먹고 자라서

내가 깃든 구멍은 몬순을 닮았다

후덥지근한 밤들이 적란운처럼 쌓이던 그곳     

고향이라 부르는 것도 아득해진

검은 해변에서     

습관처럼

구멍 난 당신을 만진다      

텅텅 빈 가계家系가 혈흔처럼 방울지고 있다     

                   -부산시문학  (2022)     


내 삶에 떠 있는 바다는 부표가 없다. 바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무시로 나를 넘나들었다. 나는 얼마쯤 헤엄쳐 갔으나 돌아보면 그 자리였다. 맴맴 맴도는 바다는 이미지와 사물의 혼돈이고 몇 겹으로 포장한 질긴 택배 상자였다.

7살의 나는 무지개빛  선박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여객 터미널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문정희 시인의 ‘기억’의 첫 소절이다. 내게도 한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그때의 나는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항구에 들어오는 배를 모두 살폈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오줌도 꾹 참고 삐질삐질 흐르는 땀은 두 손으로 훔쳐냈다. 매점 아주머니가 그런 나를 불렀다.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니.”

나는 말을 못했다. 아니 말해버리면 영영 안 올 것 같아서 입을 열지 않았다. 발설하는 순간 내 입김으로 녹아버리는 눈사람. 기다림은 순전히 내 마음대로 만든 기대와 갈망과 그리움의 카오스였다. 나는 입을 앙다문 채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머니가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성에가 빙하처럼 두껍게 언 냉장고에서 하늘색 하드를 꺼내 주었다. 하드에서 풍겨오던 시원하고 달콤한 냄새는 환장할 만큼 다정했다. 침수된 자아가 부표를 만나 잠시 기대는 느낌. 그때 거기의 현상이 나를 지치게 했다면 뜻하지 않은 타자의 호명은 아래로부터 나를 부양했다. 어린 나는 숱한 자맥질과 질긴 포장의 해체 앞에서 기진맥진했다. 여름이었고 손톱 밑이 까맸으며 나일론 원피스 안쪽에 붉은 땀띠가 가득했던 인과성의 슬픔이었다.   


  

단독성과 이중성을 가진 낱말들이 고향이라는 말을 대신한다. 돛단배, 벽돌, 오가다, 물방울, 부삽, 안팎.

두 개의 의미가 서로를 지지하거나 하나를 떠받치는 느낌은 된바람 부는 언덕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을 상쇄시켜 준다. 하여, 가까스로 나를 지탱하게 한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같은 장면이 늘 반복됐다. 어른이 돼서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두통을 어느 날은 불면을 대동한 채로.



나는 열 살이었고 맵싸한 겨울이었다. 하늘이 먹빛으로 콧등까지 내려오고 차고 건조한 바람은 미친 듯 불어댔다. 나는 뒷동산에 홀로 서 있었다. 어딜 가는 건지 아니면 다녀오는 길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이 형벌을 내리는 것처럼 사방에서 몰아쳤다. 주위에 있는 나무들은 허리가 꺾이고 풀은 머리칼을 잡힌 채 이리저리 드잡이 당하고 있었다. 쏴아악 휘잉 철크럭 퍽퍽퍽. 바람 소리는 점점 드세졌다. 나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숨이 막히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마치 물속에 빠져 꼬로록 익사하는 느낌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얼굴을 때리고 바람은 진눈깨비까지 대동해 나를 옥죄었다. 본능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스로 일어나 마을을 향해 발을 옮기는 순간, 나는 낙엽처럼 붕 떴다. 그리고 암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향을 떠올리면 그 순간이 생각났다. 그곳에 있는 냥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살아났는지 또는 구조됐는지는 모른다. 그 구간만큼은 영구 삭제 키를 누른 것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역시 겨울이었고 길고 두툼한 외투와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추위 때문에 더 공포스러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름 무장(?)을 했다. 하지만 그곳은 가시 성성한 넝쿨이 우점종을 이룬 작은 언덕에 불과했다. 살이 슥슥 베이는 억새와 가시 넝쿨이 바람을 대신해 출렁이고 있을뿐 숨 막히는 큰바람은 종적도 없었다. 나는 널려있는 돌멩이를 툭툭 차며 내렸왔다. 묘하게 그날 이후로 심연의 한 장면이 사라졌다. 가슴을 옥죄던 기억이 봉인 해제 됐다. 고비의 차강티메가 코를 씰룩이며 내 앞을 지나갔다.   


  

엄마보다 세숫비누를 좋아했다. 아니 엄마가 사 오는 다이알 비누를 사랑했으니 엄마와 비누에 대한 마음은 동격일까.


영어로 큼지막하게 ‘dial’이라고 쓰인 노란 포장지는 책갈피로 애지중지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추석 선물로 다이알 비누 세트가 들어왔다. 너무 기뻐서 선물 상자를 안고 마당을 뛰어다녔다. 식구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한술 더 떠 ‘끼약 꺅’ 갈매기 소리를 내며 온몸으로 환호작약했다. 다이알 비누는 내 생 최초의 낯설고 강렬한 타자이자, 나를 사로잡은 생소한 친밀함 그 자체였다. 나는 비누로 인해 다른 세계로 나아 갔다. 간절한 비누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늘 여기가 아닌 거기였다. 시간을 달리는 아이가 흑백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간다. 기억의 범람 혹은 발견을 굴리면서.     



바다의 알고리즘

                               고훈실     

바다가 생의 척추가 되는 순간부터

저 둥근 해원海原을 빠져 나갈 수 없다

아버지의 파도는 0과1의 미로

이물에서 고물로 이어지는 포물선이

출항을 허許하면 난바다 어디쯤에서

아버지의 투망은 기호열이 복잡했다

물오른 바닷장어 우럭 쏨펭이

한 그물씩 올리면

어긋난 타이밍처럼 빈 햇살만 가득했다

바다는 갈수록 가난해져

열일곱 처음 배에 올랐던 기억과

수심水深을 읽는 아버지 등 마저 홀쭉하다

촘촘한 그물로 아버지를 에워싼

생의 비린내가 무한 생성되고

못 박힌 손바닥에 성근 손금이 남은 건

기억이 실행을 파도처럼 깎았다는 증거

막막하게 펼쳐진 수평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천이고 만이라서

당신이 명명한 바다는 무한 복제된다 

파도가 과부하로 출렁이고

컵라면 뚜껑에 노을이 미끄러지면

흰 포말의 데이터가 바다를 귀납하고

출력하는 저녁이다

어창에 펄떡이는 몇 마리의 기호들

우주를 향해 팽창하다 

별처럼 되돌아 와

오늘의 허선虛船은 십진법 끝에 걸린 비밀번호다 

쓸모없는 메트릭스가 몇 토막 잘려나가

내일은 알짜 프로그램으로 만선을 꿈꾸는

출항은 영원히 미지수다

아버지의 해문海門만이 닫힐 줄을 모른다

                    제10회 등대문학상 수상작(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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