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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훈실 Dec 28. 2023

영화와 기억 사이

칸과 그라스


칸은 우리에게도 국제 영화제로 잘 알려진 도시다.

레드카펫을 밟고 선 유명 배우들의 화보가  막연한 동경이 되던 시절.  칸은 그저 머나먼 미지의 땅이었다.

그런 도시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 약간의 전율이 왔다.  

얼마나 많은 스타들이 이곳을  선망할 지, 이 곳에 서고 싶을지 감정이입이 과하게 된 탓이다. 물론 나는 

배우의 심정이 아니라 관객 모드 자체였지만.

레드카펫을 밟아보았다.  묘한 감흥이 인다.  붉은색이 주는 강렬함과  화려함이 내 안에 있는 또다른 나를 호명한다.  글작가 뒤에 숨은 자그마한 여배우를


칸의 첫 인상은 강렬한 태양의 도시였다.  스페인의  느낌과 비슷했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조차 열기를 식히지 못한 채 후끈했다.

길거리에 보랏빛 자카란타 꽃나무가  그나마 청량한 느낌을 주는 정도였다.

시원스런 느낌의 자카란타

배우들의 동판 핸드프린팅

내가 좋아하는 배우 손 앞에  발 인사를

영화제가 열리는 장소.  극장이 아니라 공공건물이었다.

영화제가 열리는 주변의 호텔들.  붉은 협죽도와 보랏빛 자카란타의 앙상블이 너무 멋져 보였다.


칸의 해변과 해안도로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데  해안도로를 달려보지는 못했다.

대신 시내의 멋진 건물과 다양한 사람들을 즐감했다. 인간해방구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해방의 댓가는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머니 머니 머니들이었다.

휴양지룩을  건지려고 옷가게를 돌고 돌았다. 사악한 가격표를 보고 후덜덜 했는데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원피스를 건졌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 꽃무늬가 잔잔해서 맘에 들었다.  너무 더워 후다닥 환복하고 노천 까페에서 음료를 마시는데  참 느긋하고 행복했다. 딸 이랑 두 시간을 사람구경, 인생토크를 했다.

칸의 외곽지역. 한적한 시골풍경이 오래 잊히지 않는다.

칸 시골마을의 철제대문. 피카소 그림에 나오는 꽈배기 모양이다

선홍빛 핏방울이 꽃으로 피어난듯 한  협죽도.  너무 강렬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칸 시내가 보이는 외곽마을.  이곳의 호텔은 중세시대를 체험하기에 딱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 산책했는데 그 시간이 오래 잊히지 않을만큼 호젓하고 좋았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그라스로



사실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향수의 수도 그라스 방문이었다.  향을 좋아하는 나는 향 매니아들의 성지인 그라스가 너무 궁금했다. 오기전에 나름대로 상상도 해봤다. 온갖 꽃과 허브가 피어있는 평지의 시골마을에 

향수공방과 가게가 즐비한 곳 일 거라고. 하지만 산자락을 타고 한참 올라가면서 내 상상은 금이갔다. 중세의 여느 마을처럼 그라스도 가파른  산 중턱에 위치했다.

미로같은 마을 길을 올라가니 핑크빛  우산이 허공을 가득채웠다. 동남아 어느 관광지 느낌이 나서 살짝 실망.

그라스 풍경. 노천까페  하늘에 분홍우산들이 둥실 떠있다.  


마을 중간쯤 올라가니 향수 박물관과 프로그나드 향수 회사의 공방이 있다. 향이 온 마을 을  휘감고 있다.  잠시 향을 느낀다. 꽃과 허브 이끼 나무 냄새가 조화롭게 섞인 향이다. 눈을 감고 시각 패권주의를 잠시 내려놓는다.

후각이 주는 섬세함과  감미로움으로 향을  한껏 느끼는 순간이었다.  

프로그나드는 비교적 대중적이면서 규모가 큰 향수업체다.  이 업체가 운영하는 공방에 들어갔는데 향을 채취하는 오래된 기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채취 증류 취합의 과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어 이해가 빨리 됐다.

향에 취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이 공방에서 제대로 느꼈다. 공방에서 나오면 자잘한 허브와 꽃이 만발한 작은 공원으로 연결되고 오르막을 오르면 그라스 마을 공원이 환하게 서있다.

그라스 자체가 중세마을이어서 발 아래 펼쳐지는 마을들도 중세 느낌이 물씬 풍겼다.  평지의 비옥한 농토에서 거둬들인 작물들을 산꼭대기 마을까지 힘겹게 옮겼을 농노들의 고달픔이 느껴졌다. 잦은 전쟁과 약탈에 대비하기 위한 거였다는데 예나 이제나 인간의 탐욕은 고통을 불러오는 씨앗이다.

그라스는 향수의 성지답게  작은 공방도 많고 향수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 오데퍼퓸 즉, 원액이 100미리에  50유로, 한화로 약 7만원이 채 안된다.  

뜨거운 햇살아래  은은히 번져오던 향기를  깊이깊이 호흡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라스 , 꼭 다시 가보고 싶은 향기 마을이다.




그라스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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