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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liza Dec 29. 2023

00.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을 때

 어려서부터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 시절 9시 전에 자식들을 재우는 게 육아 철칙이었던 엄마의 성화에 이불속에 숨어서 세계명작 시리즈를 읽다가 유년시절에 이미 시력을 다 버린 지 오래다. 다만 읽는 것을 좋아해 왔고 그 좋음을 따라 업을 고른 사람인지라, 다음과 같은 문장에 오래도록 동의해왔다. 이슬아 작가의 글이다.


 ‘작가의 글은 일기 이상이어야 한다. (중략)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연재하거나, 돈을 받고 쓰는 글은 적어도 일기에서 한 걸음 내딛은 어떤 것일 필요가 있었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中」


 읽는 이는 한 줌인데 쓰고 싶은 이들만 넘치는 세상이다. 도서관 대출 통계와 출판계 신간 매출은 해가 갈 수록 바닥을 향해 달려도 오만데서 다 하는 글쓰기 클래스는 무서운 기세로 마감되는 걸 모르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의 글을 좋아하고 재미있어 했지만, 타인이 읽을 글에는 어느 방면에서든 읽을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빛나는 에세이들을, 많이는 아니지만 꾸준히 읽어왔다. 그 정도의 글을 쓰는 이들만이 지면을 누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즘의 에세이들은 힐링이나 진정성 혹은 특별한 경험을 판다. 판다는 표현이 다소 쉽고 차갑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잘 팔리는 글들을 골라 서가에 꽂던 게 업이었어서 이런 매정한 표현이 입에 착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런 건조함에서도 흥미를 느끼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이 글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마음의 버튼을 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이제는 하게 되었다.


  독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책에서 발견할 때의 위로 혹은 번뜩임’ 이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장점에 가장 최적화된 분류는 818 (에세이 혹은 수필) 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개인적인 글의 가장 큰 미덕은 좋은 문장들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좋음’ 이란, 모호함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풀어 말하자면,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스스로를 얼마나 끄집어내었는가?’ 다. 그걸 많이 꺼낼 수록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있을 때 에세이를 좋아했지만 그만큼 많이 읽지는 않았다. 사서라는 직업의 이미지가 주는 스스로만의 허영 때문일 수도 있고, 읽다가 못 보겠다 싶어 덮은 책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힐링 에세이라면 질색을 했다. (여담이지만 공공도서관 도서 구입 담당 사서들 사이에서 곰돌이푸와 어피치로 시작하는 힐링 에세이는 공공의 적이다.) 이슬아 작가가 말하는 ‘일기 이상’ 에 부합하는 에세이를 지금 생각해도 많이 보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면 열린 장소에 글을 쓸 욕심이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꿈이랍시고 아프리카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떨어진 이곳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스스로의 별로인 면을 두고 자기 자신과 아웅다웅하지 않았더라면, 예전이었다면 콧등으로도 안 펴봤을 책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나는 혼자만의 이야기들을 나만의 가두리장 (aka 보석함) 에서 헤아리며 나름대로 즐거웠을 것이다.

    

 종이책의 물성을 사랑해서 사서가 되었지만,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종이책은 사치의 영역이다. 자연스럽게 (평소 좋아하지는 않던) 전자책으로 손을 뻗었다. 저작권의 파장 아래 전자책 플랫폼에는 내가 좋아하던 훌륭한 에세이들은 많이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를 읽고 싶다는 마음에 꾸역꾸역 읽게 되는 글들이 생겼다.     

 껍질을 까서 그대로 쓰자면, 여전히 마음만을 헤아리는 책들을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 책들이, 일기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책들이 누군가에게는 공감으로, 생각의 출발점으로, 경우에 따라 본인의 마음을 대신한 표현으로 가닿고 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나에게만 일기 이상이 아닌 책들이 또 있었구나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겪는 이 혼란스러움이, 운이 좋다면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겐 또 다른 적확함으로 가닿을 수도, 다른 누군가에겐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특별하게 많이 없었다. 표현력의 부족보다는 앞선 표현으로 고민한 시기가 훨씬 길었다. ‘아직 실제로 그런 사람이 못 되었는데, 내 글이 나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경계하던 시간들이 그렇지 않은 시간들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고 어느 날, 하고 싶은 말과 내가 쓴 표현의 주소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며 낯설고 슬펐다. 생활의 벅참은, 생각할 시간의 부족함은 한평생 고민하지 않던 것을 끌어당겼다. 뭔가를 기록하는 것조차, 어쩌면 유한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생전 안 먹던 마음이 덥석 들었다. 써보는 것도 괜찮겠다. 어디 있을지 모를 타인들과 부족하고 얕은 내 표현을 나누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을 때.


 남에게 다정한 위로의 글을 유려하게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아는 지를 물으신다면? 지금을 포함해 한평생 실패하고 있는 중이라 알 수 있다 답하겠다. 나의 큰 포부처럼 타인에게 적확한 표현을 찾아줄 수 있을지 아닐지 알지 못하고, 한발 양보해 재미에라도 해당될지 안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 과거의 나에게서 현재의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찾고는 한다. 만약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빌리고 싶은 표현이, 내 문단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기에. 크기도 작기도 한 마음을 품은 채, 오래도록 좋아했던 쓰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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