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liza Dec 30. 2023

01. 왜 하필 아프리카야?

 해외로 장기봉사를 나오는 건 십대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였다. 하고 싶다고 무작정할 수 없었고, 준비도 필요했다. 그래서 삼십대에 넘어와서도 남아있던 유일한 명사형 꿈이었다. 이 버킷리스트의 시작점은 고등학교 시절 어느 모의고사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나의 꿈은 기자였다. 펜이 총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어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꿈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신문부 부기장이었다. 허울뿐인 학생신문이었지만 시사 · 생활 · 문화면을 나름대로 두루 갖춘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쓰고 싶은 걸 분량 맞춰 쓰는, 한량에 가까운 고등학생 사진기자였다.  

   

 2009년, 용산에서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다 화재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가장 화재가 된 시사 사건이었다. 그 호차의 시사 기사 담당자가 내가 아니었다면, 미래가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일이 없었다면 관련 학과에 진학해서 원래 가고 싶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언제나 별일 아닌 양 이변이 들이닥친다.     


 늘 그랬듯 쓰고 싶은 주제로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지금도 그때의 내 글이 특별하게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등학교 신문부에서 발간하기에, 발행자로 교장 선생님 이름을 달고 나가기에 적합한 기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 호차 시사 기사는 싹 밀려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뉴스에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쓰는 이의 윤리를 그때 처음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한량 같은 신문부원이었지만, 대충 쓰는 기자는 아니었다. 앞으로 이걸 업으로 삼았을 때, 이런 딜레마가 다시 없을까? 그리고 그 와중에 내가 늘 나의 윤리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전에도 지금도 잘 놀라고 겁이 많다. 스스로가 기자를 꿈에서 내려놓은 이유는 올곧아서라기보다는 비겁할지언정 편하게 살고 싶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근 십년 간 가져왔던 기자의 꿈을 놓았다.      


 세상과 먼 직업이 갖고 싶었다. 밖이 시끄러워도 자기 일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이 하고 싶었다. 이전에도 도서관에는 자주 갔지만, 그제서야 도서관 사람들이 하는 일 역시 직업이 될 수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자주 봐왔던 공간인만큼 어렵지 않게 두 번째 진로를 고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아무거나 해도 다 재미있었다. 모의고사가 끝나고 일찍 집에 가는 날엔 도서관에 가서 노는 게 소소한 일탈이었다. (쓰다 보니 굉장한 모범학생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느 날은 서가에서 우연히 한 봉사수기를 읽게 되었다. 이제는 쓰는 걸로 세상에 유익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방법이 또 있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서도 그 봉사단원으로 파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 진로에 관해 두 가지 목표를 잡았던 것 같다. 첫 번째는 사서가 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전공을 활용해 해외에 장기봉사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냥 무작정 갈 수 없으니 필요한 시간을 쌓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사실 스물다섯 같은 빠른 시기에 임용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코로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이었다. 하던 일을 하며 시간이 가던 차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마음에 담은 지 오래된 일이기도 했고, 꾸준히 봉사관련 활동들을 해온데다 경력도 마냥 짧지만은 않아 지원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직장 관련해 이렇게 운이 따를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노력 부족을 이유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는 준비했다. 합격이 확정되기 전까지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적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만만한 스스로가 우습기도 한 시기였다.    

 

 출국일자를 받고서는 한동안 보지 못하는 지인들과의 약속이 몰렸다. (여담이지만 다시 한 번 내 인생에 결혼은 매우 힘들겠구나, 생각하였다. 연달아 잡히는 약속은 각오가 무색하게도 무척 많은 에너지를 잡아먹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난 한 지인이 물었다.  


 “왜 하필 아프리카야?”     


 여기 다다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그에 비례하는 명분을 쌓았으므로, 들이치는 많은 질문에 대답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 질문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 때의 내 대답은 이러하였다.     

1) 어딘가로 가게 된다면 먼 곳으로 가고 싶었으며

2) 내가 가서 하게 될 업무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 안이며

3) 일개 직장인이라 휴직 타이밍이 또 중요한데, 지원시기가 마침 잘 맞아서     


 사실 반드시 아프리카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한국에서의 일상을 멈춰두고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되도록 내 발로 가지 않을 먼 나라면 좋겠다 싶었으며 거기서 하는 주된 일이 의전에 가까운 행사치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지원하는 시점에 가서 하게 되는 업무 정도는 살펴볼 수 있었는데, 동남아는 열악할지언정 물류가 그래도 도는 편이어서 남미나 아프리카에 댈 정도는 아니었다. 행사와 연구업무도 중요하지만 먼 나라로 떠나서까지 의전하는 공주님이 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들은 여행으로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곳들이 아니던가.


 먼 나라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몸담은 조직에서는 이제껏 실무자의 역할이 제법 존중되었지만 (물론 개인적으로 운이 좋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결국 나도 조직의 일부였지 전체를 다뤄본 적이 없었다. 경험과 시간을 열악한데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려면 기존의 체계가 희미하고, 또 외국인이 존중받는 나라여야 한다. 한국에서 멀수록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나름 다년간의 봉사를 하고 또 기획까지 해보면서 두꺼워진 겉치레 역시 또 한몫했다. 이왕 가는 김에 가장 어렵고 가장 먼 곳으로 가고 싶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남반구에 오고 싶었다. 준비도 오래 해왔고, 운도 따른다고 생각하는 시기였다. 스스로와의 사이 역시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혼탁한 어린 날을 공들여 가라앉히며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쌓아온 관계였다. 사실 오기 전엔 꽤 자신이 있었다. 와서 내가 무슨 고민을 쓸데없이 또 시작할 줄도 모르는 채로, 아프리카행 출사표를 야심차게 준비하던 4월이었다. 그게 스스로에게 무슨 바람을 불러올 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작은 나라에 원서가 던져졌다. 근데 이제 그 원서가 참 해맑은데, 자기만 그 천진함을 몰랐던 거지.


작가의 이전글 00.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