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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an 17. 2024

9. 낙동강 오리알과 부산

나를 뽑고 싶다는 학교


2023년 6월, 내 지도교수님을 통해 내게 연락이 온 동부의 로스쿨 교수님 피터(가명)와 처음으로 줌 미팅을 하던 날, 교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그 글을 미국에 온지 3년 된 사람이 어떻게 쓴 거죠? 물론 내가 썼다면 조금 다르게 프레이밍했으리라 생각라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글은 미국에서 평생 살고 변호사가 된 사람도 쓰지 못하는 글인데. 놀랍다고밖에 할 수가 없네요. 그래서 우린 벨뷰씨와 꼭 일하고 싶어요. 벨뷰씨가 교수가 되는 것을 반드시 희망하진 않는다고 하니 글쎄, 박사후연구원까지 해야 하나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가 오퍼할 수 있는 것들은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으니...."


스스로를 버러지처럼 생각했던 지난 세월이 흘러갔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울었다. 학계에서 탑이라고 할 만한 피터가 내 글을 출력해서 읽은 것도 감동인데, 이렇게 극찬을 해주다니.


곁에서 나를 지켜봤던 남편. 내 아이디어가 별 볼일 없고 영어 글쓰기를 못 한다고 한사코 한글 논문만 쓰던 내게 영어 논문을 써 보라고 강권했던 이였다. "그것봐! 내가 뭐랬어!!!"라고 하면서 남편도 함께 울었다.



당장 같이 일할까요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 자리의 펀딩을 책임지는 다른 교수님 두 분 및 연구원 한 분과 인터뷰를 보았다. 몇몇 어려운 질문에서 버벅거리긴 했지만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축하한다. 다음 절차를 진행하자."는 이메일이 왔다. 해당 학교에서는 심지어 내가 졸업도 하기 전에 먼저 채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해왔다. 그러면 내 박사월급이 조금 더 올라가게 될 것이었다.


유일하게 안 좋은 점은 1년에 6-8번씩 동부로 출장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하는 남편은 걱정을 했지만, 워낙 장점이 많았기에 (1. 내가 원하는 만큼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다. 2. 원하는 만큼 학부생을 고용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 3. 원하면 강의도 할 수 있다. 4. 공무원 연봉의 2배 이상 연봉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했다.


피터 교수님을 하와이에서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관심사가 같은 피터와 나는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머신러닝, alignment 등에 대해 2-3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연구를 할 주제가 넘쳐났다. 교수님도 나도 신이 나서 자리를 떴다. 와이키키의 노을도,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숙소에서 기다리던 남편과 나누어먹은 포키와 우동도.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던 저녁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는 피터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피터가 공동 지도교수가 되고 내 남은 박사기간 펀딩의 반을 책임지기로 되어 있었다. 행정절차만 남았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가을 학기에 수업을 하나도 신청하지 않았다. 동부 출장이 언제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을학기를 시작한 10월부터 피터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우리 지도교수님과 나는 온갖 기회를 동원해 연락을 하려고 노력해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11월에 내가 아니라 지도교수님께 연락이 간 것 같았다. 펀딩을 담당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 이스라엘에 체류 중인데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 절차가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1월말까지 추가적인 업데이트가 없자, 지도교수님은 "안타깝지만 이번 기회는 없어진 걸로 간주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크게 낙담을 했다. 보통 PhD 졸업반 학생은 여름부터 11월까지 지원서 준비를 하고 12월초부터 학계나 산업계에 지원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로 갑작스럽게 잡 서치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또 다시 찾아온 기회

논문 인용 때문에 미시건 대학교 교수님과 이메일을 주고 받다가 교수님께서 "우리 학교에서 법학과 컴퓨터사이언스를 함께 하는 교수를 신규채용하고 있는데, 당신이 아주 적임자라고 생각되니 언제든 연락주세요."라고 말씀을 하셨다. 지도교수님께서는 "너 교수 지원하고 싶었니?"라고 하셨고, 난 "글쎄.. 실력이 안될 것 같아 생각을 안하고 있었던 거라, 만약 내가 좋은 핏이라면 한 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라고 답했다.


지도교수님은 "교수직을 준비하는 건 정말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피터 일 때문에 우리는 아직 하나도 시작을 못했잖니. 이번 해는 일단 산업계 연구원과 박사후연구원 지원에 포커스를 해보는게 어떨까?"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는 '박사후연구원도 이런 저런 스테잇먼트 쓰고 추천서 받고 하는 건 마찬가지에요! 저같은 외국인은 뭐가 되었든 이렇게 우호적으로 나오는 곳에는 다 지원해보는 게 맞을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비겁한 사람

피터로부터 그렇게 귀한 취급에서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게 된 후로 왠지 자신감이 떨어진데다 지도교수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서를 급조해서 교수직에 지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선 나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겁하잖아!! 지원서 그것 따위 빨리빨리 쓰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겁을 냈지? 지도교수님 핑계 대면서 그냥 도망가고 있는 것 아니야???'


결국 나는 미시건 대학교의 지원시한을 넘기고 말았다. 지도교수님은 한 참 후에 내게 "거기 안썼니?"라고 물어보셨다. '아, 쓰지 말라는 것이 엄청 진지하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구나. 미국 교수님들은 자기 의견은 참고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고 했지.'하는 생각이 들면서 혼자 괴로워했던 내가 우스웠다.


지금도 왠지 미시건이나 앤아버라는 말을 보면 가슴이 지릿해진다.



불투명해진 미래

어차피 피터가 약속한 박사후연구원도 임시직이긴 했지만, 다시 잡 마켓을 둘러보면서 나는 착잡한 마음을 지우기 어려웠다. 내가 하고 싶은 AI 법윤리 연구는 산업계에서 자리가 무척 제한적이다. 정부에 로비를 하거나 소송을 담당하는 자리는 훨씬 많지만,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결국 12월 중순에 이르러 몇 자리 없는 산업계 연구원과 박사후 연구원에 지원을 했다. 나랑 비슷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에 박터지는 경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24년 1월 현재까지 아무 곳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없었다.



남편과 나는 8월부터 자연임신을 시도 중이었지만, 내 상황이 현저히 안 좋아지면서 둘 다 열의를 잃었다. 내 차후 직장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가 생겨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나는 구직에서 실패해서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바라야할지, 아니면 목숨 걸고 구직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상황이 답답하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한국에서의 건강검진

11월, 내심 피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그 때 우리 부부는 오래 전부터 예정해두었던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한국에 갔다. 대학원 선배들, 공무원 동료들을 만났을 때 다들 향후계획에 대해 묻는데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임신인 경우 건강검진 중 엑스레이나 일부 검사를 하면 안 된다고 쓰여 있길래, 힘겹게 대장 내시경 물을 먹던 그 날 밤에 임신테스트를 했다. 예상한대로 음성이었다. 혹시 몰라 검사 당일에도 재차 테스트를 했는데, 이번에도 음성이었다. 모든 건강검진을 다 하고, 대체로 건강하다는 판단도 받았다.


마음이 편안해져서 부산에 갔을 때 친구들을 만나 신나게 먹고 마셨다. 30대 후반이 된 지금 탄탄하게 자리 잡은 친구도 있고 나처럼 여전히 방황 중인 친구도 있었다. 회와 육회와 닭똥집을 먹으면서 한국의 배달 문화에 큰 감동을 했다. 꼬냑과 좋은 와인과 위스키가 방에 넘쳤다. 광안대교 야경을 보면서 행복하고 그리운 밤들을 보냈다.



삶은 이 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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