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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Feb 14. 2020

저지른 일은 저지른 거예요.

what’s done is done.

음악에서 비롯한 주도 동기 leitmotif라는 용어는 다른 예술에도 곧잘 적용된다. 언어가 재료인 드라마에서는 특정 단어나 소리 등이 여기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어가 만약 동사라면 주도 동사 혹은 모티프 동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맥베스>의 주도 동사는 do 라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주인공의 행동이 중심이 되고 행동이란 말 그대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므로 사실 동사 do는 모든 드라마의 모티프 동사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동사가 들어간 명대사가 흔한 건 아니다. 기본 재료로 특별한 맛을 만드는 건 그야말로 대가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do 가 다른 동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게 <맥베스>라는 작품에 특히 잘 어울린다. 왕을 구하는 (save) 행동도 죽이는 (kill) 행동도 do로 대신할 수 있다. 맥베스는 본래 전자에 어울리는 이름이었으나 점차 후자로 기울어 버린다. 왕을 지키는 사람에서 왕을 죽이는 사람으로,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인다.

맥베스가 그 일을 하도록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은 그의 부인 레이디 맥베스였다. 혹자는 그가 순진한 남편을 꼬드겼다고 믿고 싶어 한다. (본래 원전에 따르면 뱅코가 역모의 공범이었으나, 셰익스피어는 뱅코를 자기 조상으로 믿는 당시 국왕 제임스 1세를 고려하여 범행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었다. 학자들은 왕이 이 작품을 직접 관람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누군가는 결혼이 연애의 끝이라고 믿지만 누군가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부에게는 살인이 그러했다. 레이디는 덩컨 왕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라 생각했으나, 맥베스는 그게 시작이었다.
맥베스는 오랜 고민 끝에 덩컨을 죽이고 왕관을 차지했으나 거기서 만족하지도 안심하지도 못한다. 마녀들의 예언은 맥베스가 거사를 치르는 데 있어 디딤돌이 되었지만, 일을 치르고 난 이후에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뱅코에게 주어진 예언 때문이다. 예언에 따르면 뱅코는 “왕이 되지는 못하지만 왕을 낳을 것”이다. (이 말 Thou shalt get kings, though thou be none. 역시 뱅코가 반드시 왕을 낳을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는 말이다. get 은 후손을 낳다란 의미에 앞서 가지다란 뜻이다. 따라서 뱅코가 한 왕조의 태조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생전에 복수의 왕을 가질 것, 다시 말해 여러 왕을 섬기게 될 것이란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것은 뱅코의 욕망, 맥베스의 걱정, 그리고 제임스 1세의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아무튼 예언을 믿는 맥베스로서는 자신이 왕이 되자 이제 다음 예언이 성취될 차례란 생각에 좌불안석이다. 왕이 되어도 좋을 게 없다. 자식이 없으니 그가 덩컨 왕을 죽인 건 순전히 뱅코의 아들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것뿐이다. 남 좋은 일. 이게 맥베스가 왕이 되고 나서 밝힌 심경이었다.
레이디는 남편의 이런 피해망상이 염려스럽다. 남편이 뱅코를 어찌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그를 불러 이제 그만 마음을 편히 하라고 타이른다. What’s done is done. 은 이때 한 말이다. 끝난 일은 끝난 거예요. 이미 다 끝난 일이다. 덩컨이 이미 관에 누워 있지 않느냐. 이제 제발 그 순간에서 벗어나라.
레이디의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부인의 말에 남편은 이렇게 응답한다.
아 사랑하는 아내여, 내 마음에는 전갈이 가득하다오! O, full of scorpions is my mind, dear wife!
어쩌면 맥베스야말로 부인의 말 자체를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부인의 말은 ‘이제 다 끝났다’에 가까웠지만 남편이 이해한 방식은 조금 달랐다. 저지른 일은 저지른 것이다. 일을 저질렀으니 예전의 평온한 삶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무고한 목숨을 빼앗았으니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피는 또 다른 피를 부른다. 내가 흘리지 않으려면 다른 이가 피 흘리게 할 수밖에 없다.
맥베스가 이 말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레이디는 남편의 이후 행보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충분히 확인한다. 뱅코의 죽음에 이어 맥더프 가족의 죽음까지 계속된 살인에 레이디의 양심이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몽유병 상태에서 레이디는 말한다.

그 늙은이에게 이렇게 많은 피가 있을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Yet who would have thought the old man to have had so much blood in him?

레이디는 몽유병 상태에서 계속 손 씻는 시늉을 한다. 아무리 씻어도 피가 씻기지 않는다. 남편이 계속 피를 들이붓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레이디의 마지막 대사에서 do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선 저지르다란 의미로 옮기는 게 좋겠다.

저지른 일은 안 저지른 것으로 할 수 없어요. 자러 가요, 자러 자요.
What’s done cannot be undone. To bed, to bed, to bed.

햄릿의 독백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잠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반복되는 to bed는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무대 위에서 이 말이 발화되면 듣는 사람에겐 too bad 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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