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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Mar 30. 2019

오필리아

일인칭 셰익스피어 - 비극편

1.

아버지는 나를 이용해 햄릿 왕자의 속마음을 캐려 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한다면서도 내 의사를 묻지는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갑자기 저리도 변할 수 있는지 나는 무서웠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잇따라 어머니가 숙부와 재혼을 한다.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반응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갑자기 재혼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는 왕실에서 이인자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하는 것 같다.


나는 햄릿 왕자가 내게 준 선물들을 가지고 나갔다.

아버지는 내게 책을 하나 쥐어 주더니 왕과 함께 휘장 뒤에 숨었다.

왕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는 혼자 뭔가를 한참 중얼거렸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봤다.

나를 요정이라고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말했다.

왕자는 선물을 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나는 선물을 준 사람의 마음이 변한 관계로 더 이상 선물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뜸 내가 예쁘냐고, 정직하냐고 물었다.

눈치를 챈 걸까.

아버지가 넣어준 말이라 자연스럽지 않았나.

나는 짐짓 모른 척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왕자의 말투와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더러 수녀원으로 가라고,

이제 앞으론 누구도 결혼할 수 없을 거라고,

결혼을 하려거든 바보와 하라고

악담과 저주를 한참 퍼부었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로 내가 속았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기가 속았다며,

겉과 속이 다른 여자들 때문에 자기가 미쳤다고 화를 낸다.

왕자가 그렇게 까지 화를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 대상이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나 역시 왕자에게 떳떳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요즘 같이 다니는 호레이쇼란 사람한테도 이런 식으로 말할까?

군인이고 학자이면서 궁정의 예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렸다는 게 그저 놀랍고 허망했다.

그를 보고 있는 동안 그의 예전 모습이 떠올라 몹시 서글펐다.


2.

왕자가 아버지를 죽였다. 왕자의 아버지는 독사가 죽였다지만, 내 아버지를 죽인 독사는 한때 내 사랑이었다.


나는 줄리엣처럼 대범하지 못하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쌓인 게 있었고 그걸 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했다. 난 싫다는 말은 감히 하지 못한 채 그런 아버지를 속으로 미워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한번 쯤 가져보는 어두운 마음을 품었다는 이유로 받는 벌이라면 너무 가혹하다.


왕자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덕분에 나도 그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어야 한다. 무방비 상태의 노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암매장을 했단다. 왕과 왕비는 자기 핏줄이 저지른 범죄라고 덮는 데 급급했다. 아버지를 가장 충성스럽고 존귀한 사람이라 치켜세운 것이 왕 아니었던가. 그 말을 했던 입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리지도 않고 제대로 된 장례도 없이 서둘러 아버지를 묻어버렸다. 죽은 사람이 어딜 간다고 그렇게 급해야 했나.


난 이제 뭘 해야 하나? 뭘 하고 싶은가? 뭘 할 수 있는가? 뭘 하면 안 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나는 법률을 배우지 못해 이 모든 절차의 불편부당을 고소하고 따질 수도 없고, 검술을 배우지 못해 힘으로 복수를 할 수도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노래를 흥얼거리고, 그리고 숲에서 들에서 로즈메리, 팬지, 회향, 매발톱꽃, 데이지 이런 꽃을 꺾어서 아버지의 무덤에 올려놓는 것 밖에 없다. 분하고 서럽고 더러워도 나머지는 내 몫이 아니다. 그게 나, 오필리아가 사는 세상이다. 


개울가에 아버지가 좋아했던 제비꽃이 아직 남아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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