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좌파고 김좌진은 우파였을까?
간도 교민들 간에 김좌진 장군의 별명은 마왕이었다. 20세기 초의 중국은 군벌이 지배했다. 펄벅의 대지는 군벌시대의 사회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병을 가지고 있는 군벌은 마치 합법적인 정부처럼 주민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가고 징집도 마음대로 했다. 소작인들은 지주, 정부, 군벌에게 착취당했다. 김좌진은 신민부라는 무장 정부를 만들고 교민들을 징집하고 세금을 거두어 갔다. 마치 중국인 군벌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교민들에게 적용했다. 신민부의 요구를 거절하면 가차없이 처벌했다.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화가난 교민들은 공산주의자를 사주하여 김좌진을 암살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가 했고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이 했다는 것이 한국사람들 간의 통설이다. 그러나 두 전투 모두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3 형제, 홍범도, 김좌진이 같이 했고 홍범도가 독립군의 총지휘관이었다. 두 전투를 분리해서 홍보하고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을 돋보이게 해왔던 이유는 한국의 반공 교육에서 비롯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유시 사건은 홍범도-공산주의자, 김좌진-우파라는 낙인을 찍게 되는 계기였다. 간도에서 동북쪽으로 아무르 강 건너에 스보보드니 시가 있다. 스보보드니가 러시아 어로 자유라는 뜻 이어서 자유시로 알려져 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일본군을 대파하여 독립군의 대단한 공로로 알려져 있지만 이로인해서 간도 교민들에 대한 일본군의 탄압은 극심해졌고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민비일가의 부패로 조선에서 살기 힘들어진 많은 조선 사람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황무지를 일구어 잘살고 있었다. 한편 조선이 망해 갈 무렵 조선 내에서 일본에 저항하여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특히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군의 토벌 작전으로 조선내에서 횔동하기 어렵게 되자 국경을 넘어 간도 지방으로 들어갔다. 간도에 들어간 의병들은 독립군이 되었다. 교민들은 이들에게 식량등 군수물자를 제공했고 독립군에 참여하기도 했다.
독립군은 본국 진공작전을 폈다. 국경 밖 중국 땅인 간도에 주둔하고 국경을 넘어 조선안에 있는 일본군,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그리고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간도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추격할 수 없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한 일본군은 간도의 조선 독립군의 뿌리를 뽑으려고 불령선인토벌작전을 계획했다. 일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조선인을 토벌하는 계획이었다. 독립군 뿐만 아니라 교민도 토벌 대상이었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독립군은 봉오동에서 청산리로 이동했다.
1920년 10월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단에 의해서 습격당했다. 일본군이 중국에 들어올 빌미를 잡기 위해서 꾸민 사건이었다.
2,000 여명의 독립군은 청산리 높은 지형에 매복하고 있었다. 이곳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이 독립군의 80%가 청산리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만가지고 골짜기로 들어 왔다. 절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독립군은 골짜기에 모여있는 일본군을 대파했다.
그러나 청산리에서 승전에 기뻐하고 있던 독립군은 마을에서 교포들이 일본군에게 동시에 도륙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개 모르고 있었다. 10월9일에서 11월5일 까지 일본군에게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었다. 재산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독립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고 있던 교민 마을이 무참하게 파괴 되자 독립군은 모두 국경을 넘어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했다. 볼세비키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였다. 당시에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레닌의 볼세비키는 적군이라고 했고 우파 군대는 백군이라고 했다. 백군은 영국, 미국, 카나다와 일본이 지원했다. 따라서 일본은 적군의 적이었고 조선 독립군 또한 일본에 저항하고 있었다.
10여개의 독립군단이 자유시로 들어오자 쏘련 당국은 독립군 모두 적군에 소속되어 공산당을 위해서 싸우라고 요구했다. 한편 독립군은 고려 공산당과 이루쿠추파 공산당으로 갈라져 서로 지휘권을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이루쿠추파 공산당이 적군의 협조를 얻어 상하이파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홍범도, 이청천 등이 적군에 합류했지만 김좌진은 자유시로 들어가지 않고 이만에서 만주로 돌아갔다.
홍범도와 지청천이 공산주의가 좋아서 적군에게 합류한 것은 아니다. 일본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방 후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은 홍범도를 공산주의 자라고 홍보했다. 그리고 적군이 장악하고 있던 자유시로 들어가지 않은 김좌진을 청산리 전투의 영웅으로 우상화했다. 그러나 김좌진은 대한민국 국민의 귀감이 될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만주로 돌아온 김좌진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신민부라는 무장 정부를 창설하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협조가 일본의 탄압으로 청산리 전투 이전 같지 않았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총사령관으로 부령제11호 5조와 6조를 발표하여 주민들의 세금납부 의무와 병역의무를 강요했다. 제5조: 본군단에 있어서 징모한 병사로서 병억의무를 기피한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군에서 청한 자금납부를 거절한자는 중벌에 처한다.
1928년10월20일, 할빈근처 빈주현에서 교민들이 모여서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 보안대가 나타나서 의무금 납부를 강요할 경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들은 이미 의무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안대는 회의장을 습격했다. 회의 개최자 황혁등 사상자 4-50명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11월하순 영안현에 모여 김좌진의 죄를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유족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중청년동맹과 한께 김좌진 암살을 계획했다.
1930년1월24일, 하얼빈 산시창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일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인 김신준에게 피살당했다. 김좌진의 나이 40세였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3월1일 99주년 3.1절 기념으로 육사 교내 중무관 현관 앞에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이회영의 흉상을 새웠다. 2023년 8월 윤석열 정부는 홍범도 흉상은 육사 밖으로 이전하고 이회영, 김좌진, 이범석, 지청천의 흉상은 육사 교내 다른곳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2025년 윤석열 탄핵이 결정된 후 모든 독립유공자 흉상을 현위치에 두기로 결정했다.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 사람들은 만주, 동 러시아, 상하이 등 중국본토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찾았다. 당시에 러시아와 중국은 공산주의가 무섭게 퍼지며 세계 공산주의 대국이 되어갔다. 중국은 우파 장개석과 좌파 모택통이 천하를 놓고 좌웅을 겨루고 있었다. 근거지 뿐만 아니라 자금도 부족한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장개석 그리고 모택통에게 의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했다.
그런데 미국이 세워준 대한민국은 철저한 반공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와 반공 주의자로 갈라놓았다. 대체적으로 장개석에게 의존하던 독립운동가 들은 반공주의자이고 레닌에게 의존하던 자들은 공산주의자로 분류 해왔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은 전자를 우대하고 후자를 푸대접했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에 기반을 두고 건국했다고 단정하기가 힘들다. 상하이(충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로 이어지지 않았다. 만주와 러시아의 독립군이 국군의 원조라고 하기는 더욱 어색하다. 한국정부, 국군, 육사 모두 미군정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문재인 정부, 독립운동 영웅중에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며 육사교정의 흉상을 옮기려는 윤석열 정부 모두 대한민국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건국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촌극이다.
옛날 이야기 되 씹어봐야 친공-반공 논쟁으로 국민분열만 조장할 뿐 국가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설프게 시작한 대한민국이지만 지금은 어였한 선진국이다. 이제는 좀더 떳떳한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