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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청장년기

과거의 행위를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라

by 온기철 James Ohn


?src=http%3A%2F%2Fcafefiles.naver.net%2FMjAxNzEwMjhfMTky%2FMDAxNTA5MTk0MzgxMDc1.iQyylClIwwvEyCArfFQOBDrqEig5baGrgEc_Lztudpkg.QEvDa7kptH8VM7gyxVJl7xO2D1a7k0lyBV7Udzhnya8g.JPEG.ndongchul%2FexternalFile.jpg&type=sc960_832 의병대장 김창수(김구)-춘하추동 네이버 브로그

김구는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분차별을 겪은 그는 양반이 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에 응시했다. 19세기 말 고종과 민비가 지배하던 조선은 부정 부패가 일상이었다.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과거시험 또한 대리시험은 물론 시험문제 사전 유출 등의 부정행위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범해졌다. 김구는 스승이 써준 답을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답안지에 베껴 써서 제출했다. 말하자면 사전에 유출된 문제의 답을 스승이 하고 김구의 아버지 대신에 김구가 답안지에 스승이 써준 답을 김구의 필적으로 적어 제출한 것이었다. 요즈음 관념으로는 어마어마한 부정행위였다. 물론 낙방이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에서의 신분상승에 실패한 김구는 동학교에 참여한다.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리에 심취했기 때문이었다. 만인이 평등한 사회에서는 양반이 될 필요가 없었다. 동학란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안에서 쏘아대는 일본군의 대포에 김구의 동학군은 패퇴했다. 홍역을 앓고 있는 동안 부대내 내분으로 자신의 농민군을 상실한 그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의 도움으로 살아 남게 되었다. 김구 뿐만 아니라 부모도 그의 집에 의탁했다. 대역죄를 지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동학란은 어찌 보면 농민과 양반, 소작인과 지주의 싸움이었다. 안태훈은 대 지주이며 미곡상을 경영하는 부자였다. 동학군은 안태훈을 위협했고 그는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공격했다.


동학란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과 청군이 조선에 들어와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동학군을 진압하고 청군을 물리쳐 조선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청나라를 조선 땅에서 몰아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시모노세키에서 만나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일본은 조선이 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 일본의 속국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민비는 러시아를 불러들여 일본의 간섭을 저지하려 했다. 일본은 민비의 정적 대원군과 협력하여 민비를 제거했다. 전국의 유학자들은 국모를 시해한 일본에게 크게 분개했다.


김구는 안태훈의 사랑에 들락거리다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게 되었다. 김구는 난생 처음으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고능선은 극 보수 위정척사파였다. 그는 김구에게 일본이 흥하여 조선을 망하게 했으니 조선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왜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김구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청나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안태훈의 사랑채에서 만난 남원 출신 김형진과 같이 백두산을 구경하고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여행을 떠났다.

김구는 신천을 떠나 평양, 강동, 양덕, 맹신을 거쳐 함경도로 들어갔다. 고원, 정평, 함흥, 혜산진에 도착했다. 그런데 백두산이 위험하다고 하여 백두산 구경을 포기하고 만주 통화로 들어갔다. 여기서 김구는 김이언이 만주 삼도구에 거점을 두고 민비시해에 분개하여 강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김이언의 의병이 강계성을 공격할 때 이에 가담했다. 그러나 김이언과 김구는 관군에게 패퇴하였다. 반역죄를 저지른 김구는 안태훈의 산채가 있는 신천으로 돌아왔다. 관군이 김구를 추적했으나 안태훈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김구가 21세 되던 해 1896년2월 다시 청나라로 가려고 했다. 평안북도 안주에서 단발 정지령 시행과 삼남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 고향으로 돌아 가던 중 1896년 3월8일 치하포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치하포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평안남도 진남포를 마주보고 있는 황해도 안악에 있는 포구이다.

김구는 투숙한 여관에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아니면 그의 일당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발견했다. 미우라 고로는 민비 시해의 주범이었다. 다음날 아침 김구는 혈투 끝에 그를 살해했다. 그러나 김구가 살해한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상인 쓰치다 조스케였다. 김구 기념관에는 그가 일본군 중위로 되어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석달 후 김구는 자택에서 체포되어 인천항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고종의 명령이 있어야 집행이 가능한 판결이었는데 고종이 방금 개통된 전화로 집행을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감옥에서 풀려 난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김구는 대학, 세계역사, 태서신서, 세계지리 등을 읽고 근대문명에 눈을 뜨고 성리학과 위정척사파의 논리가 옳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김구는 인천 감리서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장에서의 당당한 태도는 관람객을 감동시켰고 이들의 입소문으로 관람객이 날로 증가했다. 그 중에는 강화도의 놀음꾼 김주경도 있었다. 김구의 기개에 반한 김주경은 곧바로 구명운동에 나섰다.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쓰는 등 사방에 줄을 대어 김구를 석방시키려 했으나 그동안 놀음으로 모은 재산만 탕진하고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김주경은 골패에 자신만이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을 한 다음 강화도 일대 놀음판에 유통시켰다. 일대 놀음판을 돌아다니며 자신만이 아는 표를 이용하여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간수를 매수하여 김구를 탈옥시켰다.


관청은 김구 대신에 그의 부모를 감옥에 가두었다. 도망자 김구는 걸식과 초근 목피를 하며 민가에 숨어 지내며 삼남지방을 배회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공주 마곡사에 들어 갔으나 원래 목적이 관청의 추격을 피하려 했던 그에게 교리가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절에서 나와 고향 황해도 해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김구는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정진했다. 1901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예수교인이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맺어지고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다. 김구는 을사보호조약 반대 운동에 나섰다. 서울 상동교회에서 을사보호조약반대전국대회가 열렸다. 김구는 진남포 예수교회 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서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을 만났다. 이인연으로 김구는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 전덕기 목사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이다. 전덕기외에 이회영, 이동녕,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최광옥, 김규식등이 참여했다.


1910년8월29일 일본은 조선을 강점했다. 그해 11월 신민회는 양기탁의 집에 모였다.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무관을 만주에서 양성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 였다. 김구도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그런데 한달 후인 12월에 신민회 회원들이 대거 검거되는 사건이 터졌다.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경에게 발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서북지방 신민회 독립운동가들이 기독교, 부호, 지식인 등과 함께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시타게 암살을 모의했다는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평안도와 황해도 독립운동가 600명을 취조하여 105명이 검거되었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김구도 체포되어 15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5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1915년 8월에 석방되었다. 그의 나이 40이었다.


김구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것은 3.1운동 후 1919년 4월 그가 44세 되던 해이다. 임정 문지기를 원했던 그는 안창호의 천거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밀정 선우갑과 강인우가 그들의 정체를 자백하자 김구는 그들을 추방했다. 독립운동가를 따라 일본영사관의 첩자로 상하이에 온 17세 소년 김도순을 총살했다. 황학선이라는 사람이 병원을 차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은 후 약물로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그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사람의 행동 또한 자신도 모르게 사회 정의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게 된다. 신분차별을 원하지 않았던 김구는 한때 부정부패의 표상이었던 양반이 되려고 퇴락한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지주 양반 계급에 항거했던 동학군 지휘관이었던 김구는 동학군을 토벌했던 양반 부호 안태훈에 의탁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망해가는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침략으로 부터 조선을 구하려 했다. 김구는 민비 시해의 주범임을 확인하지도 않고 일본인 상인을 살해했다.


한국에서의 혼란스러운 세상은 구한말부터 대한민국 군사정권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 해방, 남북분단,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을 겪는 동안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에 봉착할 때가 어느 누구에나 있었으리라 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저지른 일 때문에 일생을 망치거나 고생하는 경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일생을 국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생애를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허다하다. 억을 한 사림들을 찾아서 보상해 주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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