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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zich Jul 05. 2018

마주친 도시 : 시작(市作).

『공유도시 : 임박한 미래의 도시 질문』을 옆구리에 끼고서.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온 사람의 천하이다. 음양의 조화가 단 하나의 종만 기르지 않고, 감로(甘露)와 시우(時雨)가 하나의 사물에만 내리지 않는 것 처럼, 만민의 군주 역시 한 개인만을 편들지 않는다. 천지는 참으로 위대하여 낳아주되 제 것으로 취하지 않고, 완성시키되 소유하지 않으니, 만물이 모두 그 혜택을 입지만 그 유래를 알지 못한다.


 기원전 239년 쓰여진, 천하에 대한「여씨춘추」의 이 묘사를 접하고 나니, 이제 인간과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 반대를 떠올리니 아주 쉬웠는데, 우리는 천하를 누군가의 천하로 여기며 또 누군가의 편을 들며 살아간다는 것, 무언가를 생산해 내면 그것을 제 것으로 취하기 바쁘고, 소유하기 위해 무언가를 완성하며, 혹여 그 혜택을 입게 되는 사람이 많아질 때면 어떻게든 그 유래를 알게 하려 애쓰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여씨춘추」에 적힌 '천하'에 대한 묘사와, 이에 대한 기계적인 대비를 통해 인간을 돌아보면서 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는지 고등학생 시절 사회문화 시간에 했을 법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다. 본격 무슨 의식의 흐름도 아니고...


 꽤 오래 전부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과 효율을 터득하면서 우리는 그것이 그저 소유물임을 넘어서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힘이 된다는 것을 경쟁적으로 깨달은 우리는 당초 스스로 만들지 않았던 자연조차도 소유의 가능성 안에 끼워넣기 시작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연이 누군가의 것인 양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더 힘있는 쪽이 묘사하는 자연의 모습이 마치 '신이 정해놓은 원칙'인 것 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태초의 자연을 이야기할 때에도, 이렇게 구성된 자연의 원칙과 기준에 맞춘 해석이 난무한다. 그놈의원래부터사람은그래왔어도대체그원래부터가언제부터인데


 이처럼, 인간이 소유의 달콤한 맛을 알게 된 이후로 자연은 그 때 그 때마다 가장 힘 있는 쪽의 언어로 설명되었고, 동시에 그것이 가장 보편적이며 타당하다고 여겨져 왔다. 그래서 모순과 부정, 설득과 전복을 통해 새로운 헤게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은 곧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 그 자체'이기에 권력자들은 앞선 기술과 언어, 사상을 끊임없이 소유하려 해 왔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누군가의 동의 없는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잔혹한 말조차 꽤 그럴 듯한 수사로 쓰이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 '대의'는 곧 행위의 목적이 되어 왔고, 그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 꽤 오랜 시간동안 인간은 사회 속에서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왔다. 이처럼 우리가 만들어낸 목적은 다시 우리를 소유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심지어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인공인지를 구분하기 힘든 수준에 다다르게 되었다. 


난 도시를 공부해본 적도 없어서 뭐가 이렇게 어렵나 싶지만 하루에 열 장씩 두 번 읽으면 재밌다.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공유도시 : 임박한 미래의 도시 질문 / 배형민˙알레한드로 자에라폴로 엮음」에 따르면, 현재의 지질학적 용어인 '현세(Holocene, 현재부터 1만년 전 까지)'와 구분되는 새로운 용어인 '인류세(人類世)'를 언급하고 있다. 인류세의 인간은 곧 자연 생태계와 지질학적 구조, 심지어 기후까지도 바꿀 수 있게 됐으며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만큼 인간의 힘이 매우 강력해졌다는 의미의 반증이다. 리프킨이 오래 전 소유의 종말을 고하며 접속을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의미하는 소유의 순간성이 때로는 착시로 인식될 만큼 우리와 만들어낸 것들의 관계는 일시적이라기보다 일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듯이.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서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우리의 도시는 왜인지 모르게 그저 많이 지쳐만 보인다. '기능적 분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도시 ㅡ경제적/정치적/기술적 요인, 일/주거/여가/교통의 분리, 자연적인 것/인공적인 것의 구분 등-는 이미 꽤나 근대적이어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자연의 상태'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해진 지금, 다시금 인간이 만들어낸 것과 자연을 억지로 분리하여 설득하는 것은 도시의 삶을 다시 한 번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접근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 책은 도시 생활을 권력에 쉽게 포획되는 여러 기능으로 쪼개기보다는 먼저 초읽기에 들어간 '도시 공유 영역'의 소재를 파악한 뒤 그것을 어떻게 권리 이양과 생태의식의 도구로서 재구축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한다는 지적을 보고, 오늘 아침에서야 내게 관심사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서울이라는 도시와 더불어 삶 속에서 '도시'라는 이름으로 마주치게 될 모습을 긴 호흡을 가지고 따라가고자 한다. 이들이 제안하는 다섯 가지 공유 양식은 나를 둘러싼 도시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볼 것을 약속하면서,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 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첫 장의 문단을 인용하면, 첫 머리에 쓴 「여씨춘추」의 그것과 꽤 괜찮은 대응이 될 거라 생각하며 오랜만에 쓰는 글을 줄인다. 빠르면 다음 주 즈음, 늦어도 이번 달 안에 다시 쓸 것을 약속하면서... 두 눈 크게 귀 쫑긋 세우고 다양하게 보내야겠구만.


 공기와 물, 불, 흙이라는 불가사의한 요소와 인공적으로 개선된 감성, 집단성, 물류, 그리고 떠오르는 신기술로 가능해진 물질대사 과정이 탈인간적 도시계획의 중심 관심사가 될 것이다. 마치 인간 활동의 배경이 되는 환경과 기후, 지형, 도구가 상관없는 듯 인간 활동에 단순히 반응하는 조직을 양산하기보다 여러 요소와 환경의 생태, 경제에 초점을 둬 도시가 훨씬 더 폭넓은 관심사에 개입하도록 설계하는-아직껏 도시 실무의 중심 축을 이루는 모더니즘의 인간 중심적 기능성을 갱신하는 것이 현재 절실히 요구되는 바다. - 「공유도시 : 임박한 미래의 도시 질문」 中


- fin (1/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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