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췄던 하루키 정주행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키를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처음 읽은 게 <Norwegian Wood>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은 <상실의 시대>. (난 왜 지금도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작명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뭔가 전후세대의 공허한 상태 같은 걸 의도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번역서가 독자의 상상력을 국한시킬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고 여겼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은 와타나베(이름 기억하는 거 실화?)가 병문안을 가서 환자 앞에서 오이를 맛나게 씹어먹던 모습. 그 기이한 장면은 환자 옆을 지키며 병원 생활을 할 때나, 내가 잠시나마 병원 신세를 지게 될 때나, 혹은 누군가의 병문안을 갈 때나 어김없이 떠오르곤 했다. 그 이후로 하루키는 말이 필요 없는 흥행 보증수표가 되었고, 하루키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상실의 시대에 클릭이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핀볼 1973> <양을 쫓는 모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세상의 끝> <댄스 댄스 댄스>까지 쭉 내달렸고, 마침내 붐! <태엽 감는 새>에서 완벽하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가 10년 동안 재즈 카페를 했는지, 야쿠르츠 타자가 친 공이 2루와 3루 중간 어디쯤으로 날아가는 걸 보고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얼마나 여행광인지, 외국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태엽 감는 새>에서 나는 하루키를 알고, 보고, 느꼈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하루키는 적어도 섹스만 밝히는 색정남이 아니라, 괜히 쿨한 척 어떤 순간에도 동요하지 않지 않는 게 멋있어 보이는 걸로 착각하는 중2 남자애가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너드처럼 풀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깊고 깊은 우물을 가슴속에 간직한 사람. 그래서 정말 내가 믿고, 늘 믿을 수 있는 누군가쯤 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1Q84>와 <해변의 카프카> 그 어디쯤에서, 그 믿음을 버렸다. 나는, 그가 이제 펜을 꺾어야 한다고 판정했다. 솔직히 그는 너무 많이 떠들었다. 그가 먹는 위스키와 그가 듣는 음악과 그가 빠진 마라톤과 외국어 등등. 그는 노출증에 걸린 환자처럼 머릿속에 든 생각을 모두 끄집어내 세상 사람들에게 떠벌리는 것 같았다. 아마 그때 페북이나 인스타, 트위터 같은 게 있었더라면 새벽에도 포스팅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 사나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서두) 하루키의 판권을 사기 위해 엄청난 선인세가 오고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아 보였다. 누구나 찾기에 뭐든 다 이야기하고 마는 작가의 글에서 느껴지는 빈곤함과 자기 반복. 너무 많이 알아버려 질려버린 섹스처럼 그의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몰입시키지 못했다. 어김없이 꼭 나오고야 마는 섹스 장면은 <왕좌의 게임>에서 나오는 그것처럼 너무 뻔하고, 너무 당연해서 헛웃음까지 나오곤 했다. 이제 그만. 작가여, 당신이 하던 말처럼 우물이 차기 전에 물을 끌어다 쓰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제발 쉬시라.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난 줄 알았다.
몇 달 전, 즐겨 듣는 <뉴요커> 팟캐스트(Writer’s Voice, 작가가 다른 작가의 단편을 낭독해주는 프로그램)에서 어느 작가가 그의 최신 단편 <Confession of a Shinagawa Monkey>를 읽어주는 걸 들었다. 거짓말 안 하고 정말 한 100번 들은 것 같다. 역시나 말하는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픽, 하고 웃기 쉽겠으나 나는 너무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여서 읽어도 읽어도 (아니 들어도 들어도) 새롭기만 한 이야기였다. 아무 생각 없이 종종 들르는 작은 서점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들어가 서 있는 곳을 발견하니 바로 하루키의 그 책(단편집 제목은 <First Person Singular>. 물론 아직 영문본) 앞이었다. 귀여운 원숭이가 빤히 쳐다보는 표지. 나는 다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냐, 이건 또. 왜 자꾸 끌어당기는 건데? 하루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과 기이한 현상이 바로 나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순간. 나는 말없이 책을 집어 계산을 하고선 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그동안 건너뛰었던 그의 작품들의 공백을 메우는 중이다. 그 공백을 메우는 일은 매우 자발적이어서 솔직히 멈출 수가 없다.
Characters who are—in a literary sense—alive will eventually break free of the writer’s control and begin to act independently.
그가 했던 말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그는 다카시의 순례여행을 미리 계획하고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을 쓰면서 다카시가 “보고 싶은 걸 보는 것이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마주하게 되는 걸 경험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도대체 이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될까. (오늘 밤은 아직도 길다.)
난 아직도 20여 년 전에 헤어진 누군가를 꿈에서 본다. 그의 이미지는 너무도 생생하고 분명해서 자면서 꿈인지 아닌지 스스로 헷갈려할 때가 있다. 이거 꿈 맞는 거지? 꿈속의 나는 자문한다. 꿈을 깨고 나면 남편에게 대강을 줄거리를 이야기해주지만 선명했던 섹스 장면까지 자세히 설명할 정도로 친절하진 않다. 대신 상세한 장면을 최대한 기억하려 애쓰며 어딘가에 적어놓는다. 눈은 다 뜨지 못해 반쯤 감겨있지만 부지런히 손가락을 놀린다. 오타가 작렬하고 커서가 제멋대로 움직이지만 신기하게 어떤 장면이었는지는 조각난 문장을 봐도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가 다루는 꿈과 현실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현실은 또 다른 현실과 연결되고, 꿈은 현실과 오고 간다. 마르케스 보다야 덜하지만 고양이가 길을 안내하고, 커널 대령과 조니워커가 말을 하고, 원숭이가 실존적 고민을 토로한다. 꽉 막힌 현실에서 답답한 벽창호 같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집단 사육을 당하는 가축처럼 다뤄질 때면 그런 마술적 상상력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알레고리와 상징들은 해석의 자유를 맛보게 하는 데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는 그럴듯하게 말이 된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는 한 번도 작문 수업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당시 일본 사람들이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막상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종이와 펜을 든 순간, 그는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오래된 영자타자기를 가져와 영어로 글을 쓴 것. 한정된 어휘와 한정된 문장 구조에서 그의 생각이 쉽고 명확하게 번역(?)되어 타이핑이 되었다. 그는 글의 서두를 그렇게 영어로 작성한 다음, 다시 일본어로 옮기는 과정을 거치며 글을 다듬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Give up trying to create something sophisticated, why not forget all those prescriptive ideas about ‘the novel’ and ‘literature’ and set down your feelings and thoughts as they come to you, freely, in a way that you like?
지금 내가 읽고 있는 하루키의 저작들은 모두 영문본이다. 그가 전체 글을 영어로 쓰고, 다시 일본어로 쓰지 않았을 테지만, 왠지 영어로 읽을 때 하루키의 스타일이 더 산다고 느끼는 게 착각은 아닌 듯. 그가 일본어로 쓴 글이 다시 영어로 번역되어 나올 때 하루키는 얼마나 자신이 쓴 글과 가깝다고 여길까? 오래도록 그의 글을 번역한 필립 가브리엘은 거의 분신처럼 하루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중학생 정도의 실력이면 읽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그의 문장들은 너무 쉽고 쉬워서 이래도 되나 싶은데, 신기한 건 그 쉬운 문장을 모아놓으면 절대 중학생이 쓴 글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 쉬운 문장으로 삶과 죽음과 관계와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정말 노장이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문득 생각이 들어 그의 나이를 찾아보니 ‘1949년생(age 73)’이라고 나온다. 한 해가 지났으니 74세인가? 적어도 지난 세월 한결같이 써온 작가라는 대목에서 그간의 불손함과 오만방자함을 사죄하고 싶다. 작가여, 미욱한 중생을 용서하시라.
그는 재즈를 들으면서 책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걸 배웠다고 하는데, 그가 꼽는 세 가지는 바로 Rhythm, Harmony, Free Improvisation. 영문본을 읽어도 특유의 리듬과 호흡이 느껴지는 게 좀 의아할 수도 있다. 보통 영어로 말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영어의 어투가 그대로 살아난다. 반대도 마찬가지. 결국 사람은 자기 스타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국어이든, 제2외국어이든. 리듬은 우리가 하는 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메아리. 그 리듬은 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타고나는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누군가가 낼 수 있는 신호 같은 것.
멋진 글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전범을 만족시킬 만한 대작을, 누군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을, 쓰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렸을 때 그는 깃털처럼, 나비처럼 가벼웠던 모양이다.
The you who is not seeking anything, by contrast, is as light and free as a butterfly.
그는 1인칭으로 글을 쓰다가 꽤 오랜 시간을 들여 3인칭으로 전환하고 마음껏 1인칭과 3인칭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꽤나 힘들었고, 엄청난 노력이 동반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고백한다.
“As I clear a new hurdle and accomplish something different, I get a real sense that I’ve grown, even if only a little, as a writer. It’s like climbing, step-by-step, up a ladder. The wonderful thing about being a novelist i s that even in your 50s and 60s, that kind of growth and innovation is possible. There’s no age limit. The same wouldn’t hold true for an athlete.”
최근 나온 그의 단편집 제목은 <First Person Singular> 일인칭단수다. 그리고 모든 작품은 모두 일인칭으로 서술되어 있다. 하나하나가 다시 또 그의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질리지 않는다. 그에게 쏟아졌던 수많은 비난(혐오까지 포함해서)에, 나처럼 ‘펜을 꺾으시라’고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기죽지 않고, 29세부터 한결 같이 글을 써온 작가에게 다시 소리 없는 박수를.
그나저나 ChatGPT에게 ‘하루키 스타일로 야구 해설해 줘’ 하면 그가 쓴 것보다 더 기막히게 단 3초 만에 A4 넉 장을 출력해낼 텐데. 하루키는 다행이다. ChatGPT가 없는 세상에서 소설가로 성공할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