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셀로판지를 대고 다시 본 4K 리마스터링
문득 영화가 당기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 내 안을 들여다보면, 좁디좁은 마음에 사랑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 차있다. 내가 경험하는 사랑이라고 해봤자 고작 배우자와의 우리 방식대로의 사랑, 부모님을 향한 공경과 연민, 반려견에게 느끼는 무한한 책임 정도가 전부이므로 다른 양태의 사랑을 아는 길은 오로지 읽고 보는 것뿐이다. 내가 아는 사랑만으로는 영 마음이 풍족하지 못하다 느껴질 때 나는 영화관에 간다. 그런 날 상영작 목록에서 <해피 투게더>와 같은 영화를 발견하면 나는 뛸 듯이 기뻐진다. 내가 모르는 사랑을 이해하고 싶을 때 찾기엔 이만한 작품이 없다.
무어라도 아는 게 있기는 있었는지 모를 20대 초반, 처음 <해피 투게더>를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의 사랑에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그러니까, 저게 사랑이라고. 저것도 사랑이라고. 글쎄. 사는 동안 미처 마주하지 못했던 인생의 조각을 이해해야 할 때면 으레 나타나곤 하는 방어적인 태도였다. 글쎄. 그 말은 좁고 편협한 나의 인생관을 숨기기에 알맞은 방패였다. 타인의 삶이 굴러가는 데에 나의 동의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편리한 말. 글쎄요. 구태여 내가 포용하지 않아도 그들의 삶은 있는 그대로 삶이니, 노 오펜스, 하는 태도로, 그러나 여전히 그들을 이해할 의향은 전혀 없기에 글쎄요, 하고 물러섰다. 사랑. 글쎄. 그게 내가 처음 아휘와 보영에게 던진 말이었다.
세월이 훑고 지나 어느덧 30대가 된 지금은 사랑이 얼마나 무수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다. 내가 모르는 어떠한 곳에서 어떠한 삶을 채우는 그 어떠한 사랑이 있음을 안다. 내가 차마 더듬어보지 못한 굴곡으로 시간을 훑으며 굴러가는 삶들을 안다. 그러니 이제야 보인다. 책임감과 연민, 간절함이 처절하게 뒤섞인 아휘의 마음이 사랑이었듯 한사코 외롭고자 하는, 그래서 끝끝내 울어버리고야 마는 보영의 마음 역시 사랑이었음을.
리마스터링이 주는 감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재개봉한 영화는 달라진 나의 시각을 마주하게 한다. 왕가위 감독의 미장센을 현재의 기술로 되살려 감상하는 것도, 세월과 함께 낡아버린 음향 대신 말끔한 장국영과 양조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감동은 주로 다른 곳에서 온다. 몰라보게 새 것이 되어 나타난 오래된 영화 앞에, 아직도 새 것처럼 빳빳할 줄 알았으나 낡고 풍화된 내 눈 앞의 셀로판지를 대고 있는 나를 확인할 때. 세월이 내 몸 바깥의 존재의 시간을 되돌리는 동안 나는 성실히 시간을 맞아왔음을 알게 될 때. 새삼스럽게 나를 발견하는 동안 나는 영화와 동시에 나를 관람함다. 평소엔 알지 못했던 나의 변화를 마주하게 하는 힘. 두 시간, 나를 끌어 앉힌 뒤 과거와의 선명한 교차로 내가 얼마나 괜찮게 낡아왔는지 돌아보게 하는 힘. 리마스터링의 힘은 거기에 있다.
20대의 나는 자신만만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세상이 정말 쉬웠다.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믿었다. 그런 내 눈에 아휘와 보영의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기괴했다. 서로를 불행하게 하면서도 탱고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불편했다. 특히 아휘를 잃고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 방황하는 보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휘가 떠난 좁은 방에 다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채워 넣는 그를 보며 한숨 쉬었다. 약 10년이 지난 뒤 영화관을 나서며 나는 울었다. 이미 끝난 일에서 비롯된, 그래서 절대 쉽게 해지지 않을 감정을 그러안고 살아갈 보영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 몇 번이고 보영과 다시 시작했지만 가족과는 쉽게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대만의 밤거리를 방황하는 아휘에게 마음이 쓰여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종종 스스로를 결정에서 따돌린 채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보다 더 자주 후회하고, 시시때때로 울며 10여 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낡아온 나는 글쎄, 하는 말로 이해의 영역 바깥에 놓아두고 잊었던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모든 일에 명확하게 설명되는 이유를 댈 수는 없지. 그러니 깊게 생각할 필요도 이해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택들을 밟고 살아가는 거니까. 알량한 나의 이해 같은 것으로 채워 넣지 않아도 사랑은 시간을 따라 흐르고 삶은 그 위로 굴러가니까.
아름답고 고귀해 닳을까 아쉽고 잃을까 두려운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까지도 사랑이라는 말이 포괄하는 감정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면 자연스레 내가 경험한 달콤하고 유려한 기억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 나는 사랑에 배신당한 기분이 들 때마다, 기쁘고 맑아야 할 내 감정이 흐리고 어두워 이것이 사랑 일리가 없다고 부정하고 싶을 때마다 보영과 아휘를 떠올릴 것이다. 분명 사랑이었고 그렇기에 외로움과 후회와 처절함으로 얼룩졌던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