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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 Apr 30. 2024

허들 내리기

이니셰린의 밴시







어린 시절의 친구 관계라는 건 큰 변화만 없으면 쭉 간다. 이해관계나 이성 문제가 얽히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상황은 변하기 시작한다. 전에는 불편함을 모르던 관계도 이상하게 불편해지고 화장실도 손잡고 가던 친구와 예전처럼 붙어지내기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씩 변하게 되고 죄책감 같은 감정도 느낀다. 친구라면서 이래도 되는 걸까? 싶다.

어느 날은 문득 모든 인간관계가 영원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절친했던 친구와의 거리를 넓힌다. 처음이 어렵지 막상 해보니까 머리 아픈 일도 없고 일상이 뭔가 간결하게 바뀌는 것도 같다.

그렇게 하나 둘 정리하다 보면 주변에 사람이 남지 않는다. 속상한 일이 있어 하소연할 사람을 찾으려고 전화번호를 뒤져도 전화할 데가 마땅치 않다. 그럴 때면 좀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또 별로다. 에혀... 다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 독고다이야... 하면서...

손절도 탄력이 붙는다. 조금만 불편하다 싶으면 빠르게 손절.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이제야 진정 어른이 되었다며 드디어 힘들고 지겹던 관계에서 독립했다고 홀가분해한다. 쿨해서 부럽다. 나는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질까 봐 걱정하는 나이가 지났는데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데는 여전히 주저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손절이 그렇게나 어렵다. 항상 의문이 드는 것이 독립적이라고 해서 모든 순간,  혼자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손절 말고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영화는 동네 사람 누구라도 인정하는 절친 관계가 하루아침에 아작나는 내용이다. 아작도 보통 아작이 아니라 손가락이 절단 나고 남의 집에 불을 지르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시작은 늙은 친구다. 손절을 할 거면 손절의 이유라도 말해 주면 좋으련만 무슨 이유인지 입도 뻥끗하기 싫다는 듯 아예 상대를 안 해준다. 손절을 당한 친구는 자다 봉창이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어제까지도 친절하게 대하던 친구가 다음날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제발 내 앞에서 꺼지라고 한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친구 관계를 영원히 끊더라도 이유는 알고 손절을 당하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처음에는 손절도 예의가 있는 거지 저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고 손절하려는 늙은 친구에게 부아가 나더니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니까 점점 반대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젊은 친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남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모르고 아무 말과 아무 행동을 막 하는, 눈치를 밥 말아먹은 젊은 친구, 악의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았을 세상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과 나쁜 버릇들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나면서 저 인간 손절을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재미는 그런 것이었다. 어느 한쪽에 감정 이입을 했다가 다시 다른 쪽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재미. 어어어... 내가 이렇게 줏대가 없는 인간이었어? 하다가 결국은 관계라는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져서 "역시 인간관계라는 건 진짜 피곤한 거야... "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게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친구 관계 또는 인간관계를 좀 산뜻하게 만들 수 없나?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신박한 방법을 생각하면서 영화 답을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마땅한 걸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 글 끝에는 지난 56년간 내가 경험하고 시행착오한 끝에 얻어낸 관계의 정의를 무심히 던져놓기로 했다. 시시하고 조금 소극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누구나 적용하기 무난하다. 그건 바로 친구에 대한 기준을 턱없이 낮추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면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관계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유일한 친구니 하나밖에 없는 친구니... 말하지 말자. 그건 자랑거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일한 관계를 잃을 때 오는 타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친구가 울면 받아 주는 걸로도 모자라 같이 울어도 주고 친구가 웃으면 안 웃겨도 웃고 배가 고프다면 자기 먹을 것도 꺼내 주고 라면 사 먹을 돈이 없다면 라면 말고 밥 사 먹으라며 돈도 주고 술주정도 받아주고 오바이트할 때 등도 두드리고 택시비도 주면서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드는 거. 서로가 그런 멀티 플레이어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지 말자는 거다. 나도 하지 말고 상대가 해주길 바라지도 말자. 부모도 등짝 스매싱 날릴 일을 친구가 해주길 바라면 안 된다.  친군데 당연하지? 같은 이상한 소리도 하면 안 된다. 한쪽은 맨날 당하고 한쪽은 맨날 참아준다면 그건 더 별로다. 친구도 뭣도 아니다. 한쪽의 노력은 결국 부담이 되고 그러다 보면 좋은 관계가 예민해진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이 정도밖에 못하냐며 섭섭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꼭 있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오우! 그 방향으로는 생각 안 해봤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브 앤 테이크? 그런 친구야말로 진정한 소울메이트인가. 그렇게 안 살아봐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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