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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Dec 08. 2020

얻어온 옷

스튜디오 1992 따수운 글쓰기 6주차 모임

  엄마는 아주 오랫동안 남을 집을 돌보는 일을 했다. 내가 처음 기억하는 엄마의 직업은 가사도우미였지만 머지않아 엄마는 방과 후 아동지도사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더욱 전문성을 가지고 남의 집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리고 매일 남의 집에 다니면서 알게 된 그 집안의 이야기들을 우리 집까지 가져와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엄마가 남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가져온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옷이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현대아파트에서 얻어 왔어." "통나무집에서 얻어 왔어." 같은 말과 함께 두 손 가득 옷이 담긴 봉지를 가져오곤 했다. 엄마가 일하러 가는 집의 아줌마 혹은 딸이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얻어온 것이었다. '현대아파트'에서는 아줌마가 잘 안 입는 비싸고 좋은 옷들을 많이 얻어 왔다. '통나무집'에서는 나보다 열다섯 살 정도 많은 '나나'라는 이름의 외동딸이 입던 옷들과 곱창 머리끈, 가죽 가방, 스웨이드 스니커즈 같은 것들을 얻어 왔다. 덕분에 내 옷장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 브랜드의 옷이 많았다. 엄마가 옷을 가져올 때마다 약간 산타 할아버지 같았고 나는 그렇게 '얻어온 옷들'을 아주 잘 입고 다녔다. 가끔씩 친구들이 내 옷의 메이커를 보고 어디 거냐고 물어보면 나는 물려받은 옷이라 잘 모른다며 둘러댔다. 그렇게 중학생 때까지 내 옷장에는 '엄마가 얻어온 좋은 옷'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고 나는 '남의 집에서 얻어온 유행이 지난 옷'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지마켓에서 최신 유행하는 디자인의 싸구려 가디건과 싸구려 스키니진, 싸구려 티셔츠를 사들였다. 대학생 때까지도 지하상가나 인터넷 쇼핑몰을 들락날락 거리며 옷장을 '내 취향의 싸구려 옷들'로 채웠다. 내가 열심히 싸구려 옷을 사대는 동안에도 엄마는 가끔 '얻어온 옷'을 입어보라며 나를 부르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주 귀찮아하며 엄마가 가져온 옷들을 대충 걸쳐보곤 "이건 너무 촌스럽다. 요즘 애들 중에 누가 이런 걸 입어."라고 말하며 엄마에게 핀잔을 줬다. 남이 안 입어서 버리는 옷들은 더 이상 입기 싫었다. 그 이후에도 엄마가 종종 '얻어온 옷'을 보여줄 때마다 "또 가져왔어?"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나의 눈은 조금씩 높아졌고 그동안 입던 보세 옷들은 더 이상 성에 차지 않게 되었다. 대신 좋은 브랜드 정장이나 비싼 청바지 같은 것들이 사고 싶었지만 나의 경제력으로는 아직 힘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와 함께 엄마의 옷장 속에 오랫동안 있던 옷들을 꺼내보았다. 예전에는 촌스럽게만 느껴졌던 '프렌즈'의 레이첼과 모니카의 스타일이 지금은 매우 세련돼 보이는 것처럼, 불과 몇 년 전에는 촌스럽고 나이 들어 보인다며 차갑게 거부했던 옷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 그중 대부분은 엄마가 10년 전에 일하는 집에서 ‘얻어온 옷들’이었다. 


  "내 취향이 변한 건가? 엄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런 옷들이 잘 어울리나 봐. 혹시 내가 입을 만한 옷 또 없어?"라고 뻔뻔하게 말하고 세 시간 동안 엄마의 옷장에서 '엄마가 얻어온 좋은 옷들'을 발굴했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머플러는 막스마라와 죠르지오 아르마니였다. 이 아름다운 머플러와 코트 여덟 벌, 바지 다섯 벌, '프렝땅'이라는 맞춤옷 브랜드의 데님 정장 세트를 내 옷장으로 가져왔다. 엄마는 어쩜 이렇게 좋은 옷들을 얻어왔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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