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여행(포르투갈-스페인)
(코로나19 확산 전 여행기입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유독 유럽은 날씨에 따라
극명하게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첫 유럽이었던) 폴란드 여행 당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계속된 흐린 날씨에
컨디션도 엉망이고 고생했던 경험 때문인지
이후로 대쪽같은 고정관념이 박혔다.
'유럽은 날씨가 흐리면 여행도 우울해져.'
물론 어딜 가나 여행에 있어
날씨가 중요한 요소겠지만
내 뇌리에는 이 단순한 이분법이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늦가을에 마주한
'그라나다Granada'의 날씨도
역시나 음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11월이 넘어가는 때라 그런지
스페인 남부 여행의 막바지가 다가올수록
날씨는 어김없이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날씨에
기대 한 줌까지 비바람에 날려버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편한 기색을 장전하고서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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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비바람 때문에 샛노란 카펫이 깔린
은행나무 길을 거닐며
찬 바람 속에 먹는 크루아상과 핫초코가
유독 따뜻하고 향긋했고,
오히려 날씨가 맑았으면 느끼지 못했을
그 묘하고도 운치를 머금은 도시 전경에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봤다.
알함브라 궁전이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무지개 가득한 어린이 동화에서 벗어나
절절한 멜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언니, 날씨가 안 좋은 게 너무 아쉽다."
분위기에 매료된 나 자신에게 어리둥절해하던 때
동생의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햇살이 쏟아졌던 세비야가 갓 착즙한 오렌지 주스라면
그라나다는 깊은 향과 뜨거운 도수를 머금은 독주였다.
그 술을 그대로 만끽하는 스스로가 살짝 대견스러웠다.
그렇게 그라나다의 마법으로
무식했던 이분법은 산산조각이 났다.
...
...
...
그라나다의 다음 여정이자
남부 여행의 마침표로 찾은 '말라가Malaga'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목적으로 추가한 도시였다.
사실 바르셀로나에 대한 기대와 준비로
말라가 자체에 대한 흥미가 딱히 없었는데
여행 준비에 휘둘려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유럽의 크리스마스..!"
알고 보니 대규모의 휴양지(!)였던 말라가는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을 위해
성탄 준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겨울이라 추웠지만
겨울이라 좋은 점도 있음을
자매는 새삼 깨달았다.
춥지만 따뜻했다.
날씨로 여행의 질을 가위질하던 어리석음은
그라나다에서 반성의 시간을 거쳐
말라가에서 비로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록 매일같이 겨울비가 내렸지만
그 덕에 가는 곳마다 촉촉하게 빛이 났고
비가 잠깐 갠 뒤에 맑은 공기로 꽉 찬 하늘은
미세먼지 걱정 없는 유럽의 상쾌함을 만끽하게 했다.
"남부 여행 마지막으로 참 좋은 곳 같아."
아무런 정보도 기대도 없던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자매였다.
여행이라는 것 자체에 지쳐있을 때쯤
그라나다와 말라가는 여행의 새로운 면을
깨닫게 해준 마무리로 완벽했다.
"집에 가기 싫어..!"
반짝거리는 트리 앞에 우두커니 서서
7살 난 애처럼 훌쩍이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귀여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중에 또 오면 되지."
"여기 말고도 갈 곳이 많은데 어떻게 또 와..."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유럽을 처음 와본 동생은
그 순간순간이 너무도 소중했던 터라
시간이 흐를수록 즐거움보다 아쉬움이 큰 듯했다.
나 역시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아이처럼 우는 동생을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동생도 나이가 들었음을 깨달았다.
바야흐로 스페인 남부는
매일매일 두뇌를 바삐 움직이며 사느라
건조하고 퍼석거리는 줄도 몰랐던 자매의 감성에
습도를 높여준 그런 도시들이다.
포스여행 10화
그리고 스페인 남부여행
아디오스 :)
© 빛정, bit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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