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좋아하세요?

방송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by 화면 뒤의 작가

오래전, 작가팀 회식 때 술을 얼큰하게 걸친 친 서브언니가

나한테 이런 질문을 했었다.

"00야, 작가는 왜 시작했어?"


곰곰이 생각 후 무난하면서도 정석적인 답을 내놓았다.

"방송이 좋아서요."

"그래? 그럼 실망했겠네."

"..."


그날은 섭외도 실패하고, 구성안도 못 쓴 채 끌려온 자리였다.

대답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후배 작가들이 생긴 현재,

나도 가끔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처음에는 시답잖은 질문을 왜 하나 싶었는데.

연차가 쌓이니 이런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방송을 좋아하지 않으면 방송작가를 할 수가 없다.'


낮은 진입장벽, 그러나 낮은 시작점

직업 특성상 피라미드 정상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송작가

방송작가는

방송일이 다가올수록 부족한 수면시간

+ 피 말리는 원고마감

+ 섭외 압박감

+ 개편 때마다 요구되는 아이디어(생각하나 나지 않는데)

+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끊이지 않는 직업이다.


진입장벽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전문 자격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공채로 선발하지도 않는다.

나의 경우,

경제학 전공에 직장 경험이 있지만 방송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작가일을 시작했다. 주변 작가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이런 과정조차 없이 작가 구인 사이트에서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방송작가 일을 구하는 경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정리해 보겠다.)


이것이 장점이 될 수 있을까?

접근성 면에서는 좋겠지만, 그만큼 페이 시작이 낮고 대체가 잘되기도 한다.

이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막내작가 과정에서

수없이 이탈되기 때문에

피라미드로 치면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공채로 좋은 기업에 입사한 대학 동기들 연봉이 5~8천 될 때

월 200 언저리를 맴도는 내 급여는 박탈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즉, 일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지 않는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의 매력도 있다.

내가 기획한 아이디어가 방송을 타고,

좋은 피드백을 들었을 때의 짜릿함은

그간의 스트레스를 깨끗하게 씻겨내기 충분하다.


관계와 말하기의 힘

모든 직업이 마찬가지겠지만, 방송작가도

다방면에 능숙할수록 살아남기 편한 건 사실이다.

교양 쪽이면 덜하겠지만 작가팀이 많은 예능이라면

점심 메뉴 정하는 것조차 실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매일 뭘 시켜 먹을지 정해야 하는데 바쁠 땐 막내가

묻지 않아도 선배들이 먹고 싶을 만한 메뉴를 '센스'있게

콕 집어 시키면 이쁨 받는다나... 요즘도 통하는 말인지는 글쎄.


서브 때까지는 메인, 메인이 돼서는 프로듀서로부터 선택받는

프리랜서 특성상, 대인관계가 원활할수록 오래 살아남는다.

EBS에 있던 시절, 한 메인언니는 때마다 담당 PD에게 선물을 바치곤(?) 했다.

일도 곧잘 하고 말은 어찌나 잘하던지, 출연하는 전문가들한테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때 방송작가는 글도 글이지만 내가 쓴 구성과 대본을

말로 피력하고 설득시키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시청자와는 영상으로 만나지만, 얼굴 맞대고 소통하는 건 제작진이기 때문이다.


기획, 구성, 편집 및 대본회의 등 작가에겐 참여할 회의가 여럿 있다.


끝까지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다

어느 분야에서든 오를 만큼 오른 위치의 사람들을 보면 알 것이다.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독하든, 여우 같아 보이든 어찌 됐든 그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함을 인정한다.

방송작가 선배들이라면 더더욱.

수십 년 연차, 나이 많은 대작가는 언젠가 후배들을 위해 내려올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손가락에 타이핑할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버틴다에 건다.

그게 현실이거든.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방송작가는 글만 쓰는 직업이 아니다.

말로 설득해야 하고, 사람과 어울려야 한다.

방송을 좋아한다면 두려워 말고 시작해 보시라.

시작은 쉽지만, 끝까지 버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나 역시 배우면서 버티고 있기에...

하지만 그 과정을 견딘다면 분명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