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스페인 출판시장에서 가장 주목받은 도서는 단연 미국 작가 마이클 맥도웰의 소설 《블랙워터(Blackwater)》 시리즈다. 지난 3월 스페인 서점가에 등장한 마이클 맥도웰은 이전까지는 스페인에서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이다. 또한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블래키 북스(Blackie Books) 또한 그동안 서점가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신선한 이름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가 펴낸 생소한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작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작가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는 문학 작가보다 시나리오 작가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영화감독 팀 버튼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크리스마스의 악몽>, <비틀쥬스> 작품의 시나리오를 썼다. ‘공포 소설의 제왕’이라고 불리며 장르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이 “나의 친구이자 선생, 미국 문학계에서 가장 세련된 작가”라고 극찬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지금까지 스페인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로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예명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1999년 작고했기 때문이다.
현재 스페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블랙워터》는 맥도웰 작가가 1983년 쓴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은 스페인에만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유럽에 처음 소개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시작은 프랑스의 한 작은 출판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40년 넘게 잊혀진 소설 《블랙워터》는 그렇게 처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었고, 두 나라에서의 큰 인기를 바탕으로 올해 3월 스페인 서점가에도 등장했다. 최근 스페인 출판시장이 호황이라고는 하나, 너무 많은 책이 서점에 쏟아져 나와 대부분 책이 1쇄 1천 부 정도만 찍는 추세이며, 1 쇄도 채 전부 판매하지 못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올해 3월 출판된 이 소설은 지난 7월 기준, 스페인 내 판매만 30만 부를 기록하는 초히트를 기록했다. 전체 유럽 기준으로는 2백만 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된다. 지금부터는 이 책이 이런 이례적인 성공을 이룬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가장 주목할 점은 이 책이 총 6권으로 나뉘어 각각 15일 간격으로 마치 시리즈물처럼 출간된 점이다. 총 800쪽이 넘는 두꺼운 한 권에 소개된 영어 원어 버전과는 달리, 유럽에서는 여러 권의 책으로 나뉘어 일정한 간격으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깝다. 이런 장르 소설이 한 권의 책에 한 번에 소개되지 않고 여러 권으로 나뉘어 천천히 출간될 때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독자들이 스포일러를 접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이다. 누군가 먼저 책을 다 읽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출간 주기에 맞춰 독자들이 천천히 내용을 접하게 되므로 다음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유지하면서 스포일러 방지도 되는 것이다. 또한 너무 두꺼운 도서는 요즘 독자들이 쉽게 시도하기 어렵지만, 이를 여러 분량으로 나누면 독자들이 더욱 가볍게 책을 펼쳐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첫 번째 성공 이유와 연결되는 점이 바로 도서의 크기와 분량이다. 원래 한 권의 두꺼운 책이었던 소설을 6권으로 나누고, 누구라도 소지하기 쉽게 일명 ‘Bolsillo(볼시요)’라고 불리는 작은 책으로 출판했다. 스페인어 단어 볼시요는 호주머니를 뜻하는 것으로, 소지하기 쉬운 콤팩트한 크기의 도서를 의미한다. 흔히 한국의 문고판 도서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워터》 스페인어판 도서의 크기는 세로 16.3cm, 가로 11.0cm, 두께 3.3cm이고, 무게는 300g, 분량은 약 200쪽 정도다. 일반 볼시요 도서와 달리 도서 내 글자의 크기는 일반 도서와 같게 하여 소지하기는 편하면서 읽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게 만든 것도 많은 독자의 환호를 받았다.
《블랙워터》 시리즈 전권 (출처: 블래키 북스 홈페이지)
독특한 표지 디자인도 책의 성공에 큰 몫을 더했다. 오로지 표지만 보고 구매했다고 말하는 독자도 상당수이다. 책의 표지는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일러스트 작가 페드로 오야르비데(Pedro Oyarbide)의 작품으로, 각 책의 소제목과 어울리는 고딕하면서 클래식하고 어쩐지 미스터리한 느낌은 준다. 덕분에 많은 독자에게 표지에 숨겨진 각종 수수께끼를 찾는 재미까지 안겨 준다. 평소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 스타일을 추구하던 일러스트 작가 페드로를 처음 컨택한 곳은 《블랙워터》의 프랑스어판 출판사였다. 이 인연으로 《블랙워터》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출판 도서의 디자인을 모두 페드로가 담당했다. 이 표지 디자인은 독자의 눈에 띄는 심미적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따라 또 다른 흥밋거리를 제공하며,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15일 간격으로 차례차례 출간되는 마케팅과 독특한 표지 디자인 외에 또 다른 성공 비결은 바로 ‘온라인 입소문’이다. 북튜버, 북토커들의 입소문을 타고 이 책은 요즘 SNS(사회연결망서비스)에서 가장 ‘핫’한 도서가 되었다. 이는 특히 청년 독자들이 이 책을 읽게 만든 데 큰 역할을 했다.
《블랙워터》 스페인어판을 펴낸 출판사 블래키 북스 담당자에 따르면 《블랙워터》가 처음 출간되자마자 한 독자가 자발적으로 텔레그램 메신저에 이 책을 함께 읽는 오픈 채팅방을 개설했고, 이 채팅방이 개설되자마자 200명이 넘는 독자들이 들어와 책이 차례로 출간되는 동안 함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런 특정 도서를 같이 읽는 온라인 독서 모임은 스페인에서는 그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으로, 이러한 현상은 지난 4월 스페인 일간지 엘 문도(El Mundo) 기사에 인용되기도 했다. 출판사 블래키 북스 담당자에 따르면, 현재 이 채팅방에서는 콜롬비아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함께 읽는 등 다른 도서로까지 온라인 도서 모임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블랙워터》가 스페인 출판계에 가져온 또 다른 긍정적인 효과이다.
그러나 이런 열풍에 우려를 보내는 시선도 있다. 《블랙워터》가 선보인 독특한 출판 방식과 마케팅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약 1만 3천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스페인의 북튜버 채널 ‘La Libreria de Dan(라 리브레리아 데 단)’은 이 책이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면 약 30유로대였을 분량의 책이지만,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어 결과적으로는 독자가 같은 콘텐츠에 대해 약 2배의 가격을 내게 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제로 《블랙워터》의 권당 가격은 9.90유로(약 1만 5천 원)로 언뜻 스페인의 평균 도서 가격에 비하면 저렴해 보이지만, 모든 내용을 다 읽기 위해서는 여섯 권의 책을 사야 하므로 실제로는 60유로(약 9만 원)라는 적지 않은 비용을 내야 한다. 이 도서의 성공으로 앞으로 출판사들이 충분히 1~2권의 책으로 출간할 수 있는 분량을 일부러 여러 권으로 나누어 출간하는 마케팅을 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이해되는 지점이다. 다만 만약 《블랙워터》가 이런 마케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이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한다. 따라서 상업적이라는 비판보다는 콘텐츠와 작가의 이력, 그리고 대상 독자층에 딱 들어맞는 뛰어난 출판 마케팅이었다는 점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작가만큼이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출판사였던 블래키 북스는 내로라하는 대형 출판사들을 제치고 《블랙워터》의 작가 마이클 맥도웰의 다른 작품 5개의 판권을 추가로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국에도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출판 마케팅 사례가 있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라는 출판사 3곳이 함께 만든 ‘아무튼’ 에세이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50쪽 분량의 얇은 문고판으로 한 손에 들어오는 이 ‘아무튼’ 시리즈 책들은 2017년 10월 ‘좋아하는 한 가지’라는 주제로 《아무튼, 망원동》, 《아무튼, 피트니스》, 《아무튼, 서재》 등의 첫 번째 시리즈 책이 나온 뒤, 가장 최근 《아무튼, SF 게임》에 이르기까지 무려 69권의 책이 출간됐다. 휴대하기 좋은 콤팩트한 크기에 읽기 부담 없는 분량, 그리고 각각의 작가는 다르지만 시리즈물로 꾸준히 나온다는 점이 《블랙워터》와 닮았다.
독자들의 취향이 세분화되고 점점 짧은 분량의 일명 ‘숏폼’에 익숙해진 시대, 이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변화하는 도서 출판 트렌드를 따라잡고 선점하는 것이 좋은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출판사의 미덕이 되었다. 이번 《블랙워터》의 성공이 앞으로 스페인 출판계의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