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제르 Dec 26. 2018

<그린 북>, 차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다

브런치 무비패스 #25


<그린 북>, 차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다


1962년 미국 북부, 허푸와 주먹으로 살아가는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비고 모텐슨)는 인종차별 주의자다. 그런 그에게 천재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의 남부 투어 공연 운전기사를 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그가 흑인이라 싫었지만 일자리가 없던 토니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남부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과 삶의 방식이 다른 셜리 박사와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인종 차별을 옆에서 바라보며 세상의 다른 부분을 알게 된다.


영화의 설정이나 상황은 상투적이다. 인종차별이 심한 1960년대 유명 흑인 뮤지션이 이탈리아 이민자와 함께 미국 남부로 순회공연을 떠나며 온갖 차별을 겪는다는 이야기다. 두 사람 모두 미국 사회에서 변방에 위치한 사람들로, 흑인은 인종차별을 겪고 있고 이민자는 제대로 된 경제 생활이 힘들다. 심지어 이 이민자는 흑인을 매우 싫어해 흑인들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다. 이런 두 사람이 당시 가장 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를 함께 다닌다. 이런 배경만 봐도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은 뻔히 눈에 보인다. 온갖 차별을 경험하다 이민자와 흑인은 친구가 된다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이다. 문제는 이것을 최대한 억지스럽지 않게 도출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에서 사용한 가장 큰 방식은 셜리 박사가 자청해서 남부로 공연을 떠난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북부도 여전히 차별이 존재했지만 남부에 비해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셜리 박사는 실력을 인정받으며 백악관에서도 공연을 했다. 그런 그가 자청해서 차별의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몰랐던 것도 아니고 달라졌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평생 몸에 익숙한 차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진해서 남부로 떠난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부딪히기로 했다.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을,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을 택한 것이다. 그게 셜리 박사가 인종차별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를 보는 미국 남부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백인 부자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고 박수갈채를 받지만 그는 건물 내 화장실을 쓰지 못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지도 못하며, 대기실로 마련된 곳은 좁은 창고다. 익숙하게 차별을 감내하지만 변화를 위한 시도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흑인들의 눈에도 다르게 보인다. 여전히 농장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남부 흑인들에게 백인 기사를 두고 좋은 옷과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흑인 셜리 박사가 낯설다. 셜리 박사는 백인에게도 흑인에게도 차별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그럴수록 셜리 박사는 매사에 신중을 기한다. 완벽한 연주는 물론이고 품위를 지키는 말투, 사람을 대하는 예의, 흐트러짐 없는 행동 등 모든 면에서 신경을 쓴다. 아무리 천재적인 실력을 지녔다 해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격받을 수 있기에 그는 매사에 잘해야만 했다. 백인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할 만한 작은 실수도 흑인인 그에게는 "그럴 줄 알았지"와 같은 가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가 곤란한 상황에서 백악관 고위 관료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에서 그의 자존심과 상황이 주는 압박감이 잘 표현된다. 그는 흑인이기에 더 잘해야 하고 더 완벽해야 하고 더 예의 바르게 해야 하고 더 자존감이 높여 매사에 책 잡힐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차별의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첫걸음은 남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 까탈스럽게 원칙을 지켜야 하고 고립감에서 오는 외로움도 견뎌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1960년대 미국에서와 같은 인종차별은 없다지만 무수히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학벌, 집안, 사는 동네, 타는 차, 누구의 지인 등 어떤 것으로도 차별을 만들어낸다. 좋은 집안에 좋은 학교를 나온 이들은 실수를 해도 "그럴 수도 있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아무리 잘해도 "그럴 줄 알았지"로 평가가 내려지는 사회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완벽해야 차별을 넘어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불리한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는 일에는 불공정하다며 분노를 일으킨다. 세상이 공정하고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어느샌가 자신에게 혜택이 되는 부분에서는 공정성을 얘기하지 않고, 손해를 보는 경우에만 마치 무기처럼 공정성을 꺼내 든다. 누구도 셜리 박사처럼 불리한 상황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안위와 평탄한 삶을 위해 누구라도 차별받고, 피해받고, 불이익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 노력하며 살아왔기에 그런 벌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혜택에 대해 노력의 결과나 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불공정한 처사나 벌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는가? 공정한 사회, 차별 없는 사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익이 돌아갈 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익과 불이익, 남의 혜택과 피해를 인지하는 것에서 공정성은 시작된다. 노력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는 것은 맞지만 배경이나 출신으로 차별을 깔아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며 노력 없이 혜택을 받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맞설 때 공정함이 생긴다. 그것은 나만의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큰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토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주먹만 쓰고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토니가 남부에서 셜리 박사의 차별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조금 달라졌다. 그냥 북부에서 나이트클럽 기도를 하며 흑인들을 무시했던 삶을 살았다면 그는 끝내 몰랐을 거다. 누군가가 어려운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다른 사람의 인생도 조금은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제공 : Daum 영화)

작가의 이전글 <부탁 하나만 들어줘>, 유튜브 시대의 흔한 반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