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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르 Jan 15. 2019

<언더독>, 평화와 공존의 시작점

브런치 무비패스 #27


<언더독>, 평화와 공존의 시작점


뭉치(도경수)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짱아(박철민) 일당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터전은 위협을 받고 있으며 개 사냥꾼에게 매일 쫓긴다. 그러던 뭉치는 산속으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밤이(박소담)와 들개 가족을 만나 이상향을 찾아 떠난다. 고속도로를 건너고 개 사냥꾼에게 쫓기며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과연 완전한 평화와 공존이 가능한 곳일까?


처음에는 동물 복지나 인간의 난개발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막상 영화는 그보다 더 심오한 '공존'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에게 버림받았지만 어떻게든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개들, 잔혹한 인간을 경험한 뒤 인간 세상을 완전히 떠나버린 개들, 이들 모두가 바라는 것은 진정한 공존이다. 버려지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 생존에 대한 위협 없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결론은 인간이 없는 세상, 아니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영화 속 개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한 곳은 사람과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인간이 아예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 말은 인간조차 가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도 된다. 인간이 오지 않아 태초의 자연 상태를 간직한 곳이 됐지만 그 말인즉슨, 진정한 공존이라기보다 위험하고도 외로운 곳이라는 의미도 된다. 하지만 인간과의 적대적인 관계가 깊어질수록 개들의 선택은 명확해진다. 더 이상은 그들의 노리개로, 새끼를 낳는 공장으로, 음식의 재료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상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버려진 산동네에서 그나마 버텼지만 곧 개발이 시작되며 보금자리가 무너지고 그런 와중에 호시탐탐 버려진 개를 잡아가려는 악랄한 인간이 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포크레인을 피해 다시 산을 오르고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고속도로까지 건넌다. 동물 복지에 앞장서는 부부를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간 세상의 한 영역이고 그들은 그 안에서 부속물일 뿐이다.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는 일, 모든 것을 시작점으로 옮겨놓기 위해 그들은 마지막 담장을 넘는다. 인간이 만든 위험과 인위적인 공포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사는 동물에 '반려'라는 단어를 붙여 동반자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그렇게 평생을 함께 지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버려지고 다른 용도로 이용된다. 필요에 의해 같이 지내고 필요가 없어지면 쉽게 외면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버려진 동물들을 사회적인 문제인양 얘기한다. 동물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문제는 여전히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주인에게 버려졌지만 인간 사회를 완전히 떠날 수 없는 그들은 본능적인 동물의 삶도, 인간과 함께 하는 반려동물의 삶도 살아갈 수 없다. 경계에 놓여 생존을 위해 떠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찾은 평화와 공존은 인간이 없는 곳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인간이 없는 곳이 있나 싶지만 우리나라에는 인간들이 못 가는 곳이 있다. 바로 비무장지대.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천해의 자연과 철조망, 지뢰 조심 표지판, 그것을 셰퍼드가 계속 얘기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인간이 없어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들의 생존권은 그렇게 지켜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나오듯 비무장지대에서의 그들의 삶은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영화가 비무장지대를 평화와 공존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매우 파격적이다. 분단의 상징이자 휴전의 증거인 장소를 새로운 터전이자 평화와 공존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이다. 분단국으로서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아픔을 다른 시각으로 제시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한 공존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동물이나 인간에게도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만들어놓은 시설이나 의도된 장치가 아닌 완벽한 자연 그대로가 평화를 향한 첫 발자국이 아닐까.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캐릭터의 개들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상황은 물론 우리가 처한 분단이라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잘 풀어냈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의 소소한 연결고리나 인간의 이기심이 공존을 방해한다는 메시지도 좋다.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에게 울림을 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중간에 만난 개를 돌봐주는 사람들의 에피소드에 나온 남자 캐릭터가 이상순으로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사진 제공 :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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