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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2. 2023

내 하루에 내가 졌어. 완전하고 완벽하게

20230412 수요일


오늘 하루에게 난 완벽히 졌다.

인정하지. 

내 패배다.





시작은 출근길이었다. 어제부터 소화가 안된 탓에 아침 사과를 건너뛰고 터벅터벅 버스를 타러 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지만 굳이 뛰지 않고 다음걸 기다렸다.

다음 신호에 건너 터벅터벅 해가 많이 길어졌네 혼자 느끼며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슈웅 


내가 타야 할 광역버스가 지나간다. 항상 그 시간에, 그 정류장에서 타는 건 나 하나밖에 없는지라

왠지 버스도 '주춤'하는 건 기분 탓일까. 뛰어도 탈 수 없었던 거리. 6시 15분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말도 안 나왔다. 차분히 버스 앱을 켜고 뒤에 오는 버스를 타고 중간에 환승하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읍내에서 출발하는 6시 30분 버스는 탈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 마저도 불안해서 계속 [사당역]을 기준으로 버스가 몇 시쯤 도착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계속 시간 계산을 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 일이 뭐고 이 회사가 뭐라고 내가 이 새벽시간에 초조해야 하는 거지.


다행히 읍내에서 다른 사당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탔을 때가 6시 45분쯤, 사당에 내리니 8시였다.

5시 40분에 일어나 6시 좀 넘어서 버스 타러 나왔는데, 회사 도착이 8시 30분이라니.

아무리 중간에 커피를 샀다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아침부터 시작이 순조롭지 않다.



회사의 직급이란 무엇일까, 책임감이란 무엇이고, 업무의 범위는 무엇일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사회생활'과 '업무 분담'을 자조하며 몰아치는 일을 해치우듯 쳐냈다.

하하 호호 오가는 스몰톡에 끼는 게 어쩐지 부담스러워 모니터만 바라봤다.

이번주 한 주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아직도 수요일이라는 사실 끔찍했다.


퇴근즈음 버스 앱을 켰는데 신의 장난일까, 도로의 장난일까?

다음 버스가 무려 1시간 뒤에 온다고 한다. 제 아무리 6시 칼퇴를 하고 뛰어간다고 한들, 난 절대 15분 뒤에 오는 버스를 탈 수 없다. 1시간 뒤에 온다니. 분명! 6시 반 도착 사당 버스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진짜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사당역에 도착하면 6시 20분 언저리, 버스를 40분가량 기다려야 한다. 

유튜브를 아무리 보고, 밀리의 서재를 아무리 읽어도 도착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할 지도 안다.


그래서 기껏 지하철 계단까지 내려가놓고는 다시 올라왔다. 역 근처 카페에 들러 카모마일유자티와 크로크무슈를 주문했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ASMR을 재생하고 책을 읽었다. 오전에 출근해서 한 챕터 읽고, 퇴근 후 두 챕터를 읽었다. 사무실에서 뻐기다 나올걸 괜히 돈썼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터덜터덜 버스를 타러 갔다. 한동안 퇴근길 버스에서 책을 주야장천 읽었는데 무슨 바람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유튜브를 보는 것도 지쳐서 이 노래 저 노래 반복하며 오늘의 퇴근송을 찾았다. 뭘 들어도 내키지 않고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어느 정류장에 하차할 때쯤, 뒤에서 나오던 아저씨가 내 좌석 뒷부분을 세게 치는 바람에 머리가 앞으로 푹 쏠렸다. 머리를 맞지 않았지만 머리를 맞은 느낌. 아. 진짜. 거친 욕이 입을 맴돈다. 

진지하게 중간에 내려서 코인노래방을 들릴까? 소리를 좀 질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더 이상 귀가를 늦출 수 없으므로, 일단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8시 35분 즈음, 집 오는 길 도로공사를 해 다소 속도가 더뎌지더라니. 

사실상 버스 타고 온 시간은 1시간 밖에 안되지만 이미 마음은 3시간이다. 


BTS의 '둘! 셋!'을 플레이하며 '그래도 좋은 날이 더 많기를' 되뇌었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 나와 맞지 않는 업무, 맞지 않은 가치관, 세워지지 않은 직업관, 

길바닥에서 버려지는 시간들, 맘 잡고 다녀야지 싶다가도 불현듯 밀려오는 현실자각타임, '좋아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그 일을 직업으로 삼지 못한 삶의 말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내 옆자리 상사의 모습이 나의 3~5년 뒤 모습인지, '일단 회사를 다니며 안정적으로 생활을 구축해 놓으며 부지런히 다른 짓을 해야지!' 했던 결심이 한 조각 두 조각 바스러지는 느낌까지. 


감당할 수 없는 상념들이 나를 덮쳤다. 


아침 버스를 못 탔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다, 첫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을 때부터였을까? 월급이 밀렸을 때부터였을까? 아님 재취업에 실패했던 시기였을까? 자아탐구를 게을리했을 때부터였을까? 


돌이켜보면 볼수록 내 잘못만 계속 나온다. 이건 뭐 화수분도 아니고.


오늘 하루 결과물에 승패를 갈라야 한다면 내 완전한 패배다.

정말 정말 힘든 하루. 말할 기운도 없어 집에 돌아와 묵묵히 씻으며 제발 이 상념들이 물에 흘러가길, 이 감정들이 수용성으로 녹아버리길 간절히 바랐던 하루였다.


어떻게 매번 이기겠어, 지는 날도 있는 거지. 


그래, 오늘은 내가 내 하루에 졌다.

인정하지.

패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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