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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04. 2022

[에로스의 종말] 4장 - 포르노

                    



 에로틱 영화는 포르노일까? 다르다. 하지만 에로틱 영화의 수위가 높으면 포로노가 되지 않을까? 오해다. 둘은 애초 목표가 다르다. 포르노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 목표다. 반면 에로틱 영화는 보여주는 것이 중심이 아니다. 보여주는 것이 아닌 가려진 것이 중심이다. 가려진 것, 은폐된 것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에로틱 영화다.


 '포르노'란 제목의 이번 장에서 한병철은 에로스와 포르노를 대비시킨다.

포르노는 전시의 대상이 된 벌거벗은 삶과 관련된다. 포르노는 에로스의 적수다. 포르노는 성애 자체를 파괴한다. 포르노가 음란한 것은 과다한 섹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섹스가 없다는 사실이 포르노를 음란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 그쳤다면 굳이 하나의 장을 할애할 필요는 없다. 한병철은 포르노와 에로스의 차이점과 더불어 2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


 첫째, 에로스를 상실한 현대 사회는 포르노화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다.

 둘째, 첫 번째 토끼를 잡기 위해 아감벤의 이론을 끌어와 활용하면서 비판하고 반박하여 자기 주장을 확고히 한다.


 첫째, 둘째로 순서를 주었으나 논리 전개는 거꾸로 이뤄진다. 즉 아감벤을 인용하고 비판, 반박하고 그 결론으로 포르노화된 현대사회를 끌어낸다.


포르노는 에로티즘의 속화이다.

 아감벤의 테제이다. 아감벤은 모델, 전시 전문가와 함께 포르노스타는 모든 것을 숨김없이 송두리채 전시한다고 말한다. 벌거벗음을 뻔뻔하게 보여줌으로써 속화시킨다. 이들은 얼굴을 전시가치로 터질듯이 채운다.


 그런데 아감벤은 속화를 긍정적으로 본다. 아감벤에게 '속화'란 "신들에게 봉헌되어 일반의 사용이 불가능했던 물건들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 또는 도덕적 명령 체계가 사물에 부과한 억압의 굴레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해방적 의미로 발전한다. 속화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아감벤의 이론을 포르노에 적용하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까? 포르노는 에로티즘에 감춰지고 억압된 인간욕망의 해방이다. 구체적인 표현성의 파안에 있는 순수한 수단으로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형식에 봉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한병철은 아감벤을 비판하고 반박하기 시작한다.

1. 비밀도, 표현도 없이 구경거리로 전시된 벌거벗음은 포르노적 노골성에 가까워진다.
2. 포르노적 얼굴은 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3. 에로틱한 것에는 언제나 비밀이 깃들기 마련이다.
4.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5.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예전 에로티즘은 제의적축제와 놀이를 포함했다. 특수한 공간, 격리의 공간을 요구했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사랑은 따뜻함 친밀함, 안전한 자극에만 국한된다. 신성한 에로티즘을 배제하고 파괴한다. 이렇게 제의적 성격을 상실한 사랑은 포르노에서 완성된다. 다시 말해 현대사회에서 사랑의 왼성은 포르노다. 현대사회는 포르노화되었다.


 이번 4장에서는 핵심적 개념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활용되고 있다. 독자가 이미 그들 개념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전제로 논지를 이끌어간다. 그래서 최대한 자세히, 정확히 읽으려 노력했지만 아직도 '속화', '비속화', '세속화'란 개념들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감벤의 책들을 기웃거리게 된다. 머리 식힐 겸 오랜만에 펼친 철학책이다. 가볍게 읽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또 다른 실마리가 유혹한다. 난감하다. 왜 이렇게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이 나이 먹도록 알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을 끊을 수 없는지....


 아무튼 방학이 되면 아감벤이 쓴 책을 몇 권 읽어보아야겠다.


 현대사회가 포르노화되었다면 교육도 마찬가지라 해야 한다.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교육이 포르노화되었다는 건 교육이 제의적 공간, 격리된 공간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다 예전 일을 떠올렸다.


 과거 배움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있었다. 고등학생들은 대학생들이 자기 전공학문으로 마법을 부린다고 착각했다. 경제학과 대학생들은 세상과 사회를 경제적인 이론틀로 완벽하게 꿰뚫고 있다고 믿었다. 대학생들에게 그런 신비감이 있었으니 박사나 교수 정도가 되면 그야 말로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고 믿었다. 그만큼 순진했고 학문과 배움에 대한 신비감이 있었다. 그런 바보스러움이 배움을 추동하는 큰 힘이 되었다. 어렵기만 한 학문을 포기하지 않고 연구하게 해 나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학문적 선배, 교사는 더 이상 신비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학문적 권위와 능력은 후배와 학생들 앞에서 벌거벗은 상태가 된다. 후배와 학생들은 선배와 교사를 동경,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한다. 학문적 권위와 깊이는 애초 관심도 없다. 그저 잘 가르치는지, 재미있게 가르치는지만으로 평가한다. 그렇게 좋은 교사와 실력없는 교사가 갈린다. 벌거벗은 교사는 교육의 포르노화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가 아닐까 싶다.


 포르노화된 교육은 상품화된 교육이다. 이제 학생은 교육을 소비한다. 학생은 교사를 자신의 실력과 취향에 따라 고른다. 온라인 교육을 생각하면 이런 경향은 이제 대세라고 해야 한다. 각 과목에 스타강사, 1타 강사들이 있다. 이들은 명품처럼 팔린다. 학생들에게 자신을 팔기 위해 광고하고, 쇼맨십이 넘치는 재미있는 강의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럼 상품화된 교육, 포르노화된 교육의 바람직한 대안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떠오르는 어떤 교육의 모습이 없다. 신비감이 넘쳤던 예전 교육이 반드시 좋은 교육인 건 아니므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후도 없다. 그런 과거의 교육도, 현재의 교육도 아닌 미래의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아직 잡히는 것이 없다. 두고두고 해야 할 고민과 숙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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