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리뷰
일곱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권여선의 소설집에서는 ‘술’이 인물과 인물을 잇는다. 술의 특별성은 맛 자체보다도 그것이 풀어주는 사연과, 비례하게 무르익는 연대에 있다. 가지 각색의 이유로 모여 앉아 고단함을 풀어내다 보면 평생의 아픔이 삶의 자질구레한 장난처럼 느껴지고, 견고한 결핍이 비로소 한 밤 어치의 숨을 얻는다. 권여선의 소설 속 인물들은 고교 동창들과 십여 년 만에 모여, 이혼 전 이별 여행을 하며, 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채로 술을 마신다. 각 사연의 경중은 뚜렷이 다르나 모두는 개별적으로 성실히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흡사 연작 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기준과 시선에 따라 그들은 삶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삶의 무게를 여실히 입증한다는 점이 그렇다.
<삼인행>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특별히 컸다. 이혼 전 이별 여행을 떠나는 규, 주란 부부. 그러나 그들은 마치 다른 이름을 가진 여행길에 오른 것처럼 맛집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장사항의 홍게 식당을 가기 위해, 경포해변의 수제 버거 가게에 가기 위해 과속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딘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이 여행의 여정이 내게는 이혼의 무게를 미식의 즐거움으로 풀어보려는 쉬운 셈이 아닌, 거대한 슬픔의 위장과 그 잠식성에 대한 비유로 읽혔다. 끝난 자리에 미식과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여전히 남는다는 사실로 인간은 속절없이 초라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일종의 몽환 상태를 유지하며 여행을 이어나가던 그들은 익숙하게 서로를 찌르고 짓밟기도 한다, 삶과 여행이 반대어가 아님을 입증하듯. 하지만 여행의 막날에 도착한 어느 식당에서 그들은 눈이 내리는 정경을 배경으로 술을 마시며 기어코는 이대로라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냐,고 조심히 발설한다. 이 대화를 이별의 번복으로 보는 것은 순진한 오독이겠으나 나는 적어도 이것을 지난 사랑에 대한 조용한 추모,로 읽었다. 추모는 지속되지 않고 그래서 힘을 잃을 테지만 그렇게나마, 거대한 슬픔이 얼굴을 드러내었다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술, 술로 아픔과 결핍을 얼마나 깨끗하고 완전하게 게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흰 안개처럼 품은 채 책을 덮었다. 아마도 ‘작가의 말’ 이 예견하듯 아무리 마셔도 끝장이 나지 않는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자꾸 조갈이 날 테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것이 풀어주는 사연과, 비례하게 무르익는 연대로부터 오늘 밤을 안녕히 보낼 용기를 얻는다. 그것이 비록 내일을 살아갈 힘 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밤 어치의 숨은 매일 밤 소중하다.
소설은 늘 제 주인의 아우라를 반영한다고 생각해 왔다. 서늘한 눈을 하고 어렴풋한 온기가 있는 입매를 가진, 작가의 얼굴을 함께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