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따로 살고 있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의 할머니 집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간다. 그 많은 저녁 식사를 해왔으면서도 점점 까먹고 있는 저녁식사 티켓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근해진다.
요 근래 빠진 나만의 달콤한 시간이 있다. 맘 같아선 식빵에 땅콩잼과 딸기잼을 넉넉히 펴 바르고 싶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이니 작은 쌀과자 두 개에 올려먹고 싶은 만큼 듬뿍 얹어먹는다. 가끔 회사에서 일하기 싫어질 때면 지금 겪는 불행이 커지는 만큼 반대로 돌아가서의 확실한 행복은 커질 테니, 달콤한 시간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을 다잡곤 할 만큼 나에겐 없어선 안될 시간이 돼버렸다. 길고 길었던 하루를 지나 할머니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여느 때와 같이 달콤한 시간을 음미하고 있던 중 부엌에서 할머니 호출이 있었다. 도중에 흐름을 깨긴 싫었지만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먹으며 남는 미역으로 뭘 해먹을지 얘기했는데 다시마 요리법을 알려주는 할머니. “다시마는 너무 두꺼운 거 말고 얇은 걸로 골라야 해, 중간불로 적당한 온도에 다시마를 또 한꺼번에 넣지 말고, 하나씩 튀기도록 해.” 깨끗한 기름에 담가진 다시마가 작은 거품들 속에 스르륵 잠시 모습을 감추는 듯하더니 금세 새로 변신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간식으로 종종 할머니가 해주는 다시마 부각을 먹곤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눅눅해지니 갓 튀겨내서 살짝 식혀야 마치 핫도그처럼 위에 솔솔 뿌린 설탕이 제 모습을 유지한 채로 다시마와 하나가 된다. 결정이 되어 박힌 설탕옷을 입은 다시마부각은 마치 입에 들어갈 단장을 끝냈다는 듯 우아하다. 바삭! 하며 부서지는 다시마끝자락에 사각! 하며 느껴지는 설탕의 식감이 나의 최애모먼트다. 사실 어쩌면 이 설탕맛을 느끼고 싶어 다시마 부각을 찾는 게 아닐까. "내가 없어도 네가 혼자 해 먹어", 무심한 듯 내뱉는 할머니께 "싫어요, 건강하게 사셔서 오래오래 할머니가 해주는 다시마 부각 먹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할머니보다 한 살 위의 우리 동네 노인회장 후보자 얘기를 나누고 잠시 소파에 누워 할머니와 티브이를 보다 (사실 할머니는 티브이를 보는 내 뒤에서 담요를 덮고 주무신 시간)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 됐다며 자리를 정리했다. 집에서 같이 자는 것도 아니면서 너네 집에 가서 잘 거냐는 할머니의 말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전기세 아낀다며 꺼버린 전등불에 아련히 보이는 할머니의 실루엣은 어느새 이렇게 작아졌을까. 할머니 키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돼 더 이상 내 키는 커지지 않는데도 매년 할머니는 고개를 뒤로 더 젖혀야지만 내 얼굴을 바로 볼 수 있다. 둘만 있는 조용한 검은 공간 안에서 열린 가방을 닫아주시고는 잠시 돌아보라며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잠깐 안아보자며 와락 감싸안는 할머니의 행동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할머니와 몇 번을 더 안아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태생적으로 먼저 애교를 피우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집에 와서 할머니 밥을 먹는 일뿐이다.
최소 8시가 돼서야 집에 오는 예비 동반자와 종종 할머니집에 들러 저녁을 함께하곤 한다. 저녁을 이리 늦게 먹어서 배고파서 어떻게 하냐, 우리로서도 하릴없는 상황 속에 더 맥 빠지게 하는 대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늘어놓는 할머니. 오랜만에 갈 때면 안쪽 깊숙하게 박혀있던 반찬들까지 꺼내 그 넓은 상위를 가득 매운다. 다 먹을 수도 없으니 이렇게 안 꺼내셔도 돼요, 손사래 칠수록 할머니 반찬은 늘어간다는 것을 알기에 긴말하지 않고 수저를 든다. 상대 때문에 같이 늦게 먹을 수밖에 없는 손녀를 앞에 두고 그저 새로 들어올 사위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밥 먹는 동안에도 이어지는 할머니의 넋두리. 눈앞에 있는 손녀나 신경 쓰세요, 퉁명스레 내뱉으니 얼굴에 멋쩍은 웃음만 지어 보이는 할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가족이란 존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맘 상하고, 함께한 몇 곱절의 시간만큼 깊은 감정에 골짜기에서 서로에게 소리치며 지겹게도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면 보고 싶어 지는. 괜히 잘해줬다며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다가도 지나가다 좋은 게 보이면 단번에 생각나는 사람들. 맘에 안 드는 일만 골라서 하는 통에 애먼 속만 썩인다고 여기저기 읊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지나가는 포장마차에 놓인 따뜻한 붕어빵을 한 움큼 사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게 가족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