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여행_10
… 여행 둘째 날: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 점보 시푸드 칠리크랩(Jumbo Seafood Riverside Point), 스리 마리암만 사원(Sri Mariamman Temple), 불아사(Buddha Tooth Relic Temple), 차이나타운(Chinatown), 머라이언 공원(Merlion Park), 가든 랩소디(Garden Rhapsody) …
푸르스름함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거의 반사적으로 암막커튼을 걷으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이불속에 누워 있다가 씻기, 화장하기, 옷 갈아입기와 같은 최소한의 행위만 한 채 출근하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마리나 베이 샌즈를 호위하듯 감싸는 화려한 불빛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눈뜨자마자 전에 없던 부지런을 떨게 한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왜 사람들이 경치 좋은 집, 이를 테면 ‘한강 뷰(veiw)’를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일상 속 나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면 매우 부지런해지지 않을까 상상해봤다.
유명하다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의 조식을 배부르게 먹고 서둘러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으로 가기 위해 호텔 근처 프로메나드(Promenade) 역으로 출발했다. 서두른 첫 번째 이유는 빡빡한 일정에 대비해 계획한 시간까지 꽉 채워 조식을 먹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보태닉 가든 다음 일정인 점심식사를 한국에서부터 예약했기 때문이었다.
프로메나드 역은 호텔 입구에서 나와 큰 길로만 가면 매우 쉽게 갈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이상하게 ‘지름길’에 대한 유혹이 컸다. 바로 습한 날씨 때문이었다. 본디 큰 쇼핑몰이라면 사방팔방 출입구가 있지 않은가. 건물을 통과하면서 조금이라도 습함을 달래는 에어컨 바람을 쐬겠다는 꾀가 떠오른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 방법은 썩 좋지 않았다. 건물 안에 들어가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가장 적합한 출구를 찾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전시된 물건들과 사람들을 요리조리 헤치고 가다 보니 에너지가 몇 배로 들었다. 평소 걷기는 좋아하지만 쇼핑몰을 걷는 건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몫했다. 덕분에 호텔 뒷동네를 구경하긴 했으나 구글 지도에서 알려준 대로 큰길로 가니 훨씬 가깝고 편해서 나의 노력(?)이 허무하기까지 했다.
보태닉 가든 역에서 내려 MRT 출구를 향해 가는데 점점 덥고 습한 기운이 몰려왔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곧장 입구(Bukit Timah Gate)가 보였다. 입장료는 없다. 그러다 보니 나처럼 카메라를 든 전형적인 관광객의 차림이 아닌 가벼운 차림으로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입구에서 몇 걸음을 옮기니 호수가 보였다. 호수 근처에 백조가 있으려나 싶었는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닭이었다. 몇몇 아이들이 닭을 잡으려고 뒤를 쫓았고 놀란 닭이 정말 사력을 다해 뛰며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자기 몸의 몇 배가 되는 인간들에게 쫓기는, 게다가 수적으로도 열세에 처한 닭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말이 너무 궁금해 쭉 지켜봤는데 닭이 이겼다. 행여 잡혀서 날개깃이 뽑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는데 닭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을 다 둘러볼 생각은 없었다. 인공적으로 꾸민 정원이나 식물원에 가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아서 꼭 가고 싶었던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난 싱가포르에서 어디까지나 여행자의 입장이었고, ‘싱가포르 최초의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이라는 명성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면적은 49ha인데 축구장의 크기가 대략 0.7ha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넓다. 따라서 유명한 밴드스탠드(Bandstand)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미리 예약한 점심 식사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지하철역으로 복귀하는 걸 목표로 했다.
밴드스탠드는 길 따라 쭉 가다 보니 나왔다. 하지만 만약 밴드스탠드에서의 인증 사진만 찍으려고 한다면 보태닉 가든 역 근처에 있는 입구로 가지 말기를 바란다. 당시 나는 흰색의 자그만 구조물을 밴드스탠드라고 부르는지도 몰랐고, 무작정 가다 보면 곧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그 넓은 보태닉 가든을 가로지르게 됐다. 그것도 왕복으로. 여행 후 4개월이 지나 글을 쓰는 지금, 뒤늦게 보태닉 가든 홈페이지에서 지도를 보고 있는데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두고 온 손 선풍기를 절실히 그리워하며, 조깅하는 사람들을 경외하며 두 시간가량 인생 처음으로 느낀 더위와 습함에 맞서 보태닉 가든을 걸었다.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곳이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고 하면 괜히 엄숙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이곳은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동네 공원 같은 느낌이었다. 보태닉 가든을 걸으며 백조, 닭에 이어 무리 지어 가는 수달, 으슥한 곳에서 쓱 움직이는 도마뱀(혹은 도마뱀과 비슷한 파충류)도 봤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를 제약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건 이곳이 1859년, 즉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을 때 영국인들이 조성한 곳이라는 점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사유를 보면 그때 조성한 걸 잘 유지하고 있어서 선정됐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싱가포르와 영국의 관계에 대해 찾아보니, 적어도 그들의 관계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싱가포르의 시작은 1819년 영국의 래플스(Sir Stamford Raffles, 1781~1826)가 열었는데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싱가포르는 무역항으로 자리 잡았으며, 독립 후 현재에도 ‘영연방’이라고 부르는 영국 중심 연합체(Commonwealth of Nations) 회원국으로 남아 있다.)(@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나무위키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을 돌며 지칠 대로 지쳐 짜증 낼 힘도 없었던 나는 일찌감치 한국에서부터 예약한 점보 시푸드 리버사이드 포인트(Jumbo Seafood Riverside Point)로 향했다. 12시 30분으로 예약을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주변을 배회하다가 혹시 조금 일찍 식사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흔쾌히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식당 내부는 매우 컸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인들을 나란히 배치해줬다. 자리 배치 덕분에(?) 한국인들끼리 서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메뉴 주문 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도 싶었는데, 현지 점원들이 이미 한국어로도 꿰고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시키는 메뉴는 뻔했고, 나 역시 그 뻔한 메뉴들을 시켰으며, 주문할 때 영어라는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오직 마주 앉은 일행과 모든 걸 해결하는 분위기였다. 대학 시절 서울·경기도 시내버스를 한동안 타다가 오랜만에 고향인 경상도 시내버스를 탔을 때 특유의 정겨움을 느꼈더랬지. 낯선 싱가포르에 있는 한 식당에서 좁은 간격으로 배치된 식탁에 다른 한국인들과 나란히 앉아 있으니 문득 그때의 그 감정이 떠올랐다.
칠리 크랩, 그리고 칠리 크랩 소스에 찍어 먹기 위해 추가로 시킨 빵, 시리얼 새우가 식탁에 올라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건 식사가 끝나갈 무렵 뒤늦게 곁들인 타이거 맥주(Tiger Beer)였다. 그때 난 ‘맥주가 시원하다.’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맥주를 마시면 오히려 더워진 적이 많았다.) 에어컨 바람도 잠재우지 못한 내 몸의 열기를 맥주의 알코올과 탄산이 휘발시켜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점보 시푸드에 대한 후기를 끝내기엔 좀 섭섭하니 나머지 음식들에 대한 맛 후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싱가포르 여행을 준비하며 어쩌면 관광지보다 더 많이 고민했던 게 ‘점보 시푸드 vs 호커센터’였다. 이미 수많은 블로그 후기를 봤고, 바로 직전에 이곳을 방문한 지인의 이야기까지 들어서인지 맛이나 자태가 엄청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색다르긴 했다. 한국에서 먹은 게 요리들은 순수하게 찌기만 하면 너무 느끼했고, 매콤하게 양념된 건 너무 자극적이었는데 칠리 크랩의 소스는 느끼함도 잡아주고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그 소스에 찍어 먹는 빵도 생각보다 촉촉하고 쫄깃해서 좋았다. 반면 새우 요리는 한국에서처럼 몸통은 소금에 굽고 머리는 새우에 튀기는 게 깔끔하고 좋은 것 같다. 시리얼 가루의 맛이 강하다 보니 새우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을 함께한 일행은 시리얼 새우가 맛있다고 했으니 음식 맛과 선호도는 개인 취향이 많이 작용함을 잊지 말자. 사실 비행기에서 만난 재외동포 분은 점보 시푸드는 비싸기만 하다며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한 어느 가게와 호커센터(Hawker Center)를 추천했었다. 또 한 번 싱가포르 여행이 허락된다면 다른 곳도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 물론 그때는 시원한 맥주를 식사 초반에 주문할 거다!
식당 인근 지역에 관광지가 몇 군데 있어 둘러보고 호텔로 복귀하기로 했다. 배도 차고 더위에 지친 몸도 식으면서 다시 걸을 힘이 났었던 모양이다. 고백하건대 이번 여행에서 확정된 일정은 여행 첫째 날 가든스 바이 더 베이와 둘째 날 점심식사, 여행 마지막 날 유니버설 스튜디오 방문이 전부였다. 나머지 일정은 전혀 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양심에 찔렸는지 비행하는 동안 하나투어에서 제공해 준 싱가포르 여행 책자를 보며 흥미로운 관광지들을 훑어보고 지도에 표시하기는 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8년 12월 오사카 자유여행 때는 구글 지도 길 찾기 결과까지 캡처해가며 파워포인트까지 만들었었다! 그때와 비교해 사전 준비를 너무 안 한 셈인데 이상하게 조급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철저하게 일정을 짜도 여행은 내 맘 같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점보 시푸드 리버사이드 포인트에서 조금만 가면 쳐다볼 수밖에 없는 독특한 외관이 건물이 나온다. 건물 상단에 ‘PARK ROYAL’이라고 적혀 있는데 찾아보니 파크로열 온 피커링(PARK ROYAL on Pickering)이라는 이름의 호텔이었다. 독창적인 외관과 친환경 설계가 건축 문외한의 뇌리에 제대로 각인됐다. 싱가포르의 독특한 건축물들만 따로 둘러보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건물들을 많이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관련 기사, Visit Singapore '건축물')
파크로열 온 피커링 호텔을 지나 스리 마리암만 사원(Sri Mariamman Temple) 방향으로 가는 길에 마스지드 자마에(Masjid Jamae, 혹은 Masjid Chulia)라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있었다. 담장에 있는 구멍을 통해 안을 살짝 들여다봤는데 너무 엄숙해서 무서운 느낌까지 들었다.
스리 마리 암만이라는 이름의 힌두교 사원은 얼마 가지 않아 나온다. 힌두사원의 탑문을 고푸람(Gopuram)이라고 부르는데, 탑문 바로 앞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꼭 건물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아래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스지드 자마에와 달리 내부 구경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는데 신발은 밖에 두고 양말까지 벗은 뒤 입장할 수 있다는 말에 발길을 돌렸다.
같은 방향으로 쭉 가다 보면 불아사(Buddha Tooth Relic Temple)가 나온다. 이슬람 모스크와 힌두교 사원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특유의 분위기에 긴장이 됐었는데, 불아사는 친숙한 불교 사원인 만큼 한결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부를 들어가 보니 한국의 사찰과 달리 너무 화려해서 놀랐다. 불아사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는 거대한 사리탑에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를 보관한 데서 붙여졌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있는 작은 마당 한 바퀴를 돌며 분위기만 대강 느끼고 나왔는데, 이제 와 보니 화려한 내부를 볼 수 있는 무료 가이드 투어도 진행한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 두 시간가량 진행되는 이 투어는 사전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불아사 홈페이지, Visit Singapore '불아사', 트리플 '불아사 용화원')
사우스 브리지 로드(South Bridge Rd)를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사원을 재빠르게 본 나는 차이나타운을 통과해 차이나타운 역으로 가기로 했다. 상점들과 식당들이 줄지어 있는 이곳을 지나니 마치 인사동과 남대문시장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건 구경, 사람 구경을 하며 역을 향해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도대체 무슨 냄새야?’ 싶었는데 TV에서만 보던 두리안의 냄새였다! TV를 볼 땐 ‘과일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과일인 만큼 한 번 맛볼까도 싶었지만 막상 고약한 냄새를 맡고 나니 얼른 그곳을 떠나려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싱가포르의 지하철 MRT를 타면 ‘두리안 금지’라는 표시를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이유를 알 만 했다.
싱가포르 보태닉 가든에 이어 점보 시푸드의 칠리크랩과 시리얼 새우, 각기 다른 세 개 종교의 사원들, 차이나타운까지 돌아보며 눈과 배를 채운 나는 호텔로 복귀해 샤워를 한 뒤 한 시간 정도 수영장 베드에 누워 선선한 바람과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휴식을 취했다.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여행을 가면 늘 바삐 다니기만 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좋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김대진 선생님이 꼬마 피아니스트를 가르치면서 “쉼표도 연주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여행이라는 오선지에 난 늘 음표만 가득 채웠었는데 쉼표를 처음으로 그려 넣었던, 그리고 그 쉼표를 처음으로 연주해봤던 순간이 아니었을까?(@김대진 마스터클래스 영상)
여행의 팽팽함을 잠시 누그러뜨린 나는 다시 채비를 해 밖으로 나갔다. 어제 못 본 가든 랩소디(Garden Rhapsody)를 보려면 조금 더 어둑해져야 했다. 밤을 기다리며 머라이언 공원(Merlion Park)을 둘러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이곳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로 굉장히 가까웠다. 가는 길도 굉장히 평탄했다. 마치 동네 앞 공원 한 바퀴를 돌 듯 평화로운 기분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반대편을 돌아보니 마리나 베이 샌즈가 웅장하게 서서 ‘이곳은 관광지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다시 앞을 보니 그제야 에스플러네이드 브리지(Esplanade Bridge)와 머라이언 상을 중심으로 빼곡히 서 있는 관광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인파를 뚫고 멋진 사진을 찍고야 말겠다는 팽팽함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머라이언(Merlion)은 인어(mermaid)와 사자(lion)의 합성어로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1964년 싱가포르 관광청의 로고로 처음 등장했는데 인어는 항구의 도시를 상징하고, 사자는 ‘사자의 도시(Singapura, 싱아푸라)’라는 별칭을 가진 싱가포르를 상징한다.(과거 싱가포르 땅에 도착한 한 인물이 어떤 동물을 보고는 사자로 착각하면서 사자의 도시라고 불렸고, 이것이 곧 국호로 이어졌다.) 머라이언을 봤을 때 우리나라에 있는 해태(혹은 해치)가 자연스레 연상됐는데 이 해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비슷한 이름과 형상을 찾아볼 수 있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위키백과 '머라이언', 위키백과 '해태')
수많은 인파를 뚫고 머라이언을 만난 뒤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까 머라이언을 보러 가는 길에 코넛 잉크라는 작은 가게에서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걸 봤는데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나 사서 바다가 보이는 계단에 푹 앉아 맛을 봤다. 코코넛 워터를 함께 줬는데 생각보다 너무 느끼했다. TV에서는 다들 참 시원하게 잘도 마시던데 내 입엔 영 아니올시다. 머라이언 공원 근처에는 두리안을 닮은 독특한 생김새를 가진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 – Theatres on the Bay) 공연장이 있는데 글쎄 야외극장 홍보 영상에 조성진이 나오는 게 아닌가! 갑자기 애국심과 팬심이 솟아올라 몇 분간 꼼짝을 않고 서서 그가 나오는 홍보 영상을 다시 보고 나서야 다시 발을 뗐다.
있는 여유, 없는 여유 다 부리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지며 주변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바삐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걸음을 옮겼다. 해가 거의 져서 어둑해졌을 무렵 겨우 가든 랩소디가 열리는 현장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 찼다. 좋은 자리, 안 좋은 자리 가리기엔 너무 늦었던지라 엉덩이 붙일 만한 곳을 찾아 겨우 앉았다.
단언컨대 가든 랩소디는 꼭 봐야 한다! 낭만적인 음악과 화려한 불빛을 멍하게 듣고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수많은 인파에 섞여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주저앉아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깨끗하고, 다양한 문화가 섞여 다채롭고, 도심 녹지 비율이 높으며 창의적인 건축물들이 있는 ‘바로 이곳이 싱가포르다!’라는 걸 약 15분간의 쇼가 말해주고 있었다. 슈퍼트리들의 독특한 생김새와 뿜어내는 빛깔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싱가포르에 대한 환상을 제대로 심어주었다. 보다 보니 에버랜드에서 본 야간 퍼레이드나 동네 공원에 설치된 음악 분수가 생각나기도 했고, 돗자리를 깔고 누워 수많은 별들과 별똥별들을 봤던 잊을 수 없는 기억들도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어둠을 헤쳐 밤에도 가시지 않는 습기를 식힐 겸 마리나 베이 샌즈 쇼핑몰(The shoppes at Marina Bay Sands)로 들어갔다. 천장에 매달려 눈부시게 빛나는 장식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은 디지털 라이트 캔버스(Digital Light Canvas)의 또 다른 화려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더위도 식힐 겸 쇼핑몰을 돌아보는데 빗물을 재활용하는 레인 오큘러스(Rain Oculus)와 인공 운하가 시선을 사로잡았다.(@마리나 베이 샌즈)
어제는 바삐 가느라 놓쳤던 헬릭스 브리지에서의 불빛들을 즐기며 숙소로 걸어갔다. 방에 도착해서도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 나는 한참을 유리창에 기대서서 마리나 베이 샌즈를 배경으로 한 스펙트라 쇼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고단했던 하루를, 실질적인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