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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의 목록

삶을 짓는 문장 24

by 모카레몬 Mar 12.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물질이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True minimalism begins
not with possessions,
but within



쓸모 있는 나무는 일찍 베어진다. 계피나무는 향기가 있다고 하여 베고, 옻나무는 베어서 칠에 쓴다. 하지만 옹이가 박히고 결도 좋지 않아 어디에도 쓸모없었던 나무는 베어가는 사람이 없어서 가장 크고 무성하게 자라 원래 나무의 본성을 발휘한다. (주1)   




목련의 꽃망울이 봄물을 받고 있는 동안, 진달래와 개나리의 빛은 집안에도 가득합니다. 묵은 이불이 바람 속에서 출렁이고, 먼지떨이와 빗자루가 구석구석을 훑어내지요. 장롱 뒤, TV 뒤, 수납장 뒤, 책상과 벽 사이, 화장대 밑. 평소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의 먼지를 쓸어내다 보면,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과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빛이 바랜 엽서, 다 쓴 공책, 한 짝만 남은 양말, 오래된 편지지. 동전... 영월댁 친할머니는 저에게 눈으로 물어봅니다. 이것들을 버려도 괜찮을지 말이에요. 

할머니가 제게 베푼 배려이기도 합니다.



봄맞이 대청소가 달갑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집 안을 정리하며 오래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셨지요.

"아버지, 그거 버리면 안 돼요!"

"쓸 데 있나? 버린다!"

투정 부릴 새도 없이, 낡았거나 쓰임새가 없는 물건들은 바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저에게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어요. 손때 묻은 인형, 그림을 그린 노트, 구겨진 책갈피 하나에도 나름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몰래 묶어 놓은 쓰레기봉투를 뒤집니다. 아버지에겐 쓸모없는 것이지만, 제겐 의미가 있거나 유용한 것들이죠.



결혼을 한 후, 제 손으로 집을 정리하고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봄이 해에도 곳곳을 정리했지요. 가장 문제는 책과 그릇과 옷가지들입니다. 

"이거 뭐야? 쓰지 않잖아. 그냥 버리자!"

"안돼, 오빠!"

"왜?"

"이거 선물 받은 거야!"

선물이라는 말로 내둘렀지만, 속내는 많이 아까웠지요.

"이건 버려도 돼?"

여전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입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


장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가장 중요한 쓸모를 지닌다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크고 튼튼한 나무를 좋은 나무라고 하지만, 너무 크면 오히려 목재로 쓰지 못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쓸모없는 나무’라 부릅니다. 하지만 그 나무는 도끼날을 피하고, 베어 지지 않으며,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남습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이 ‘쓸모없는 것’인지 쉽게 판단합니다. 정말로 필요 없는 것인지, 지금 당장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물을 ‘도구적으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바라볼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나 그 기능을 잃어버린 순간, 그것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도구가 고장 나거나 쓰이지 않을 때, 오히려 우리는 그것이 본래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2)


한때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반면, 한때 하찮아 보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삶을 지탱하는 존재가 되기도 했지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 전까지 많은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남겨 두었습니다. 남편에게는 쓸모없어 보일지 몰라도, 저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지요.




정말 버려야 할 것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것을 쌓아두고 살기도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버리는 것들도 수두룩했습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어떤 것을 끝까지 남겨야 할지 몰랐었죠.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세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그것(I-It)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너(I-you)의 관계이지요.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사물을 단순한 도구로 대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린다. 하지만 '나-너'의 관계에서는 대상과 깊이 연결되며 의미가 만들어진다. 우리는 물건조차 ‘그것’이 아니라 ‘너’로 바라볼 때가 있다. 오래된 책이나 다이어리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주3)


작년에 지금까지 모아 둔 책들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새로운 책을 구입하더라도, 더 이상 책을 쌓아두지 않고 필요한 것만 남기자는 취지에서 결정한 일이었지요. 처음에는 후련했습니다. 책장을 비우고 나니 공간이 넓어졌고, 미니멀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했지요. 기증이라는 말은 선한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밑줄을 긋고, 메모하고 색인까지 해두었던 수많은 책들입니다.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제 삶의 일부이기도 했어요. 어떤 구절이 생각나도 다시 펼칠 수 없고, 손에 익은 연필자국을 더듬을 수도 없습니다. 그 책들은 이제 더 이상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무엇을 버린 것일까요?

낡은 종이를 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책과 함께 기록한 시간을 버린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동시에 경고합니다.


 너무 많은 규정은 우리를 속박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제한하기도 한다.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고 믿지만,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된 삶 속에서는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4)


책을 기증한 것으로 인해 빈자리를 더 깊이 느꼈습니다. 물건이 사라지고 난 후의 공간이 반드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때로는 빈자리가 이전보다 더 큰 무게로 남습니다.


어떤 기억은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 빈자리가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마치 오래된 나무의 옹이가 불규칙하게 자리 잡아 나무를 쓸모없게 만들지만, 바로 그 옹이 덕분에 나무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처럼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쓸모없다'라고 규정하지만, 어쩌면 쓸모없음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것이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그것이 우리 곁에 얼마나 깊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도구가 고장 나거나 쓰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지요.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책들도 그렇습니다.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인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시간을 새겨둔 나만의 소중한 기록이었다는 것을요. 




버려진 것들은 어디로 갈까요?


기증된 책들의 행방을 생각해 봅니다. 낯선 사람의 손에 들려 있겠지요. 새로운 독자가 다시 밑줄을 긋고, 낯선 메모가 추가될지도 모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품고 있던 기억의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긴 것일 수도 있겠어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현대성(liquid modernity)’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너무 쉽게 관계와 사물을 소비하고, 빠르게 대체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고 했지요. 
사람도, 관계도 쉽게 버리고 쉽게 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기능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지요.  때로는 ‘쓸모없음’ 속에서야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정신의 미니멀리즘, 무엇을 버릴까요?


우리 부부는 책부터 시작해서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미니멀 라이프’를 향해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작 우리의 정신을 새삼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특히 제가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생각, 쓸데없는 감정, 불필요한 집착과 불안들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어요.
매일 그것들도 함께 버려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책장을 비우고, 가재도구를 줄이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동안에도, 제 안에는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합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은 쉽게 정리할 수 있었지만, 내면에 쌓인 생각과 감정들은 매일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긴 산책 시간, 드넓게 펼쳐지는 저녁노을, 창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 한 줄기.

이 모든 것들은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압니다.

제가 정말 버려야 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불필요한 기준과 불안이었습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약속했지만, 사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길 것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남겨진 것들이 말해주는 것


책장을 정리한 후, 시집들과 필요한 책을 다시 구입하였습니다. 그 외 필요한 도서는 밀리의 서재에서 필요할 때마다 다운로드를 하지요.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책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능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친구와의 우정과 부부의 사랑과 부모와 자녀와의 친밀함들 말이죠. 

아침 태양을 바라보는 시간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것과 한 줄의 시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과연 어떤 쓸모를 가져야만 존재할 수 있을까요...


도구적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은 ‘무용(無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무용이 곧 유용이다"라고 말합니다. 

쓸모없다 할지라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요. 


오늘도 떠나보낼 것은 떠나가게 두고, 남을 것은 남겠지요.

쓸모없음이야말로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라는 것을 마음에 담고 싶습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목록을 살피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남기도록 결단합니다.


후회하지 않도록요.



주1> 장자. 현암사. 오강남 옮김. 1999.

주2>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주3>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표재명 옮김. 문예출판사. 2001.

주4>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옮김. 2013.





글벗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사진출처> pixabay

#쓸모 #목록 #미니멀라이프 #버리기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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