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31번 중>
일찍 등교하는 학생이 교실에 들어서기 전, 나의 하루는 이른 새벽에 시작되었다. 검푸른 여명을 머금은 하늘이 빛을 마주할 때, 잠든 도시의 발소리와 도로의 경적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멈출 수 없는 힘이 나를 끌어당길수록,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내 중심엔 불안이 버티고 있었다. 매일 아침, 신께 하루를 의탁하는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유다. 내가 느낀 불안은 단순히 걱정이 되거나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딘가로 나아가야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더 근원적인 에너지였고, 멈추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존재의 리듬이었다.
퇴직을 하고도 여전히 불안과 씨름하고 있다. 산책을 하거나 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도 머릿속은 계속 움직인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불안을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아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로 보았다. 그는 불안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표현하며, 이 불안이 우리를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고 했다. 살아가는 동안 끝없는 선택과 자유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인 동시에 가능성의 열림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왜 나는 원치도 않으면서 움직이고,
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지?
이 질문은 내 안의 깊은 불안을 헤집어 놓는다. 삶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같아 보이지만, 그 물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여정이다. 네루다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잠재력과 새로운 기회의 가능성을 믿는 믿음만큼 두려움 또한 커져서 나를 재촉한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내가 멈출 때 맞닥뜨릴 선택의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움직임은 생명 그 자체다. 자연은 멈추지 않는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내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생명이 내 안에서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나는 천천히 자라나는 나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들이 있는 풍경을 안고 뒷산을 오르내리며 뛰어다녔다. 엄마 말에 의하면 갓난쟁이 때부터 유난히 뒤척이고, 손수건 한 장이 해질 때까지 집요하게 늘어뜨렸단다. 아이러니한 것은 쉴 새 없이 놀다가도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혼자 모래놀이터에 가만히 앉아 훌쩍였던 그 순간에도 내 손은 모래를 쌓고 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의 나와 현재의 나를 점으로 이으면 셀 수 없이 흐르는 생명의 선과 진동들로 이어질 것이다.
신경림 시인의 ‘길’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길은 우리를 밖으로 내몰아 온갖 풍경을 구경시키면서도, 결국에는 내면으로 이끌어 스스로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삶의 움직임은 불안과 희망을 직면하게 하고, 길 위에서 끈질기게 흔들리며 빛난다. 그 흔들림마저 생의 빛이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과 동행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움직임의 주체는 나일지라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행운, 실패와 기회, 시작과 마무리는 일상속에 언제나 함께 했다.
길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 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 1942>은 인적 드문 도시의 한구석을 연상케 한다. 불빛 속에 잠시 머물러 있지만, 정적의 옷을 입은 고독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그림 속 인물들은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내면에는 끊임없는 불안과 가능성이 뒤엉켜 흐르고 있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 불안이 내 안의 고요를 깨우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쉼 없이 나를 밀어내는 힘이 된다. 멈춰 선 순간에도 흔들리는 마음,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진동이다.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이 끝없는 움직임을
그렇다면, 이 움직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만히 있음과 움직임의 경계에 머무른다. 움직임은 단순히 외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의 충동을 반영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불안과 갈망이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든다. 불안을 피하지 않고 그 움직임의 본질을 껴안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삶의 방향과 속도를 조율할 수 있다.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움직이는 이유는 우리 안에 생명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생명이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네루다의 질문은 이 불완전한 삶 속에서 끝없는 탐구와 사유를 열어준다. 오늘도 움직이다 머무르고 멈추다 다시, 움직임의 파동 안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여러분은 네루다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하고 싶은지,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그 답을 어떻게 적용할지 궁금하다. 그 답변으로 당신만의 아포리즘을 만들어보자.
질문 속에 피어나는 아포리즘
불안은 내 안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속삭이는 파동이다
Anxiety is a wave that whispers that
the life inside me is alive
나만의 아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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