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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영 Apr 22. 2024

오늘 내가 제일 잘한 일

마흔엔튜닝_사십대 북에디터의 기타 분투기

[도도서가 = 북에디터 정선영] 직장인 사이엔 이런 말이 있다. “오늘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한 일이다.”  내 얘기다. 따지고 보면 비단 직장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한 해 한 해 더 할수록 일을 통한 자아 성취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 같았다. 북에디터로서 첫 책임 편집으로 나온 책을 받아들었을 때 그 설렘과 감격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여전히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받아 안는 일은 기쁘지만 솔직히 모든 책이 그렇진 않다. 연차가 쌓일수록 ‘작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고 잘한 일은 당연하다’는 주변 인식도 나를 지치게 했다. 성취감 같은 건 느껴보기도 전에 ‘잘난 척하지 말라’는 주위의 은근한 눈총도 받아내야 했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과 인정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에 따르면, 나는 4단계 존중과 인정의 욕구에서 매번 좌절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다. 


빠듯한 출간 일정 속에 나는 어느새 책 만드는 기계가 되어 갔다. 기계적으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홍보를 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갈 책은 나가고 안 나갈 책은 안 나갔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 책에 100을 쏟아부었는지, 30을 쏟아부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았다. 기계적으로 만든 책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이래선 안 된다. 뭔가 다른 게 필요했다. 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당연히 성취감도 느끼고 싶었다. 그래 취미를 갖자, 기타를 배우자! 성취감을 느끼자!


아무튼 뭔가 새로운 걸 배우고 싶다고 생각할 때의 나는 새로운 걸 배워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이놈의 기타, 성취감은커녕 내게 좌절감만 주고 있다. 


성취감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구만리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상상했던 내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아,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다시”, “아니”, “집중” 레슨 시간에 내가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내 손은 기타줄 위에서 오갈 데를 잊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세상에 집중이라니… 아니 선생님 제가 집중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제 손이 말을 안 듣는 것을요. 저는 어디 가서 집중력이나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기타를 배우면서 나는 그간 스스로에 대해 굉장히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예컨대 이런 것. 나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다(코드 7개 외우는 데도 두 달 가까이 걸린 걸 보면 머리가 굉장히 나쁘다), 나는 책 20~30권은 번쩍번쩍 들 정도로 힘이 세다(F코드는커녕 C코드 제대로 쥘 힘도 없다), 나는 일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다(직장 생활 한정이었나 보다.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연습 계획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마흔 하고도 몇 해가 지나서야 나는 주제 파악, 다른 말로 현실 인식을 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정신의학에서는 이 현실 인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실 인식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되는데, 자아정체성과 매우 관련이 깊다. 기타를 배우며 이제라도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으니 이건 참 다행이다.


적어도 기타에 있어서 지금 내 상태로는 매우 멀고도 험난 길이 예상된다. 정신발달학적으로 인간은 태어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각 연령별로 그에 주어지는 과제(미션)을 완수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 그 과제는 생각보다 어렵고, 수차례 좌절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완수할 수 있으며, 그 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면 불완전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는 말한다.  


인생의 중반에서 나는 지금 눈앞의 과제를 잘 완성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 과연 나는 당장 이 도전 과제 ‘기타’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 <마이데일리> 연재 중

https://www.mydaily.co.kr/page/view/2023041115563103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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