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소 Dec 24. 2020

[편지X에세이] 산타를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더선>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건 볼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꽤 영악한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한 달 전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며 올해는 산타할아버지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다든지, 올해 착한 일을 많이 했다는 등 매일같이 자기 어필을 했었다.

그러면 엄마는 한 해 동안 착하게 행동하긴 했으나, 아직 크리스마스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 시키는 심부름을 잘 해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적어도 12월 한 달 동안은 심부름도 나름 잘하고 말도 나름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살았다. (물론 심부름을 하며 올해 받고 싶은 선물을 다시 한번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7살부터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았다.

내 눈으로 직접 내게 12월 24일 밤 선물을 주는 존재를 봐 버렸으니 말이다.


7살 12월 24일은 산타클로스를 내 눈으로 보겠노라 작정하고 밤을 새우려 한 날이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려던 이유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아마 10시도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든 것 같다.

하지만 평소 잠귀가 밝기도 했고, 그날은 머릿속에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밝히겠다는 생각을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예민하게 머리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계획대로라면 당장 눈을 뜨고 선물을 두고 가는 손을 냅다 잡아채야 하지만, 갑자기 머릿속에 무서운 이미지가 하나 떠올랐다.      

1년 전 유치원에서 산타클로스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유치원 학예회가 끝나고 원생들이 하나하나 무대 위로 올라가 산타클로스에게 안겨 선물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반별로 차례대로 줄을 서 산타클로스를 만나길 기다렸다. 친구들이 하나둘 커다란 선물을 받아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내 차례가 다가왔다. 분명 산타클로스를 만나는 건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커먼 공간에 노랗게 내리쬐는 조명 아래 빨간 옷을 입고 길고 북실 거리는 수염을 단 커다란 사람이 나를 바라봤고,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산타클로스에게 가지 않으려는 나를 유치원 선생님이 손을 잡고 끌어 억지로 무대 위로 올렸고, 나는 굳은 걸음으로 산타클로스에게 다가가 안기기는 커녕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선물을 받아 내려오면서 엉엉 울었던 것 같다. 내가 우는 장면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왜 우냐고 놀리던 사람들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무튼, 여섯 살 내게 산타클로스는 너무 무서웠다.     


1년 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유치원에서 산타클로스는 가짜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실제로 산타클로스는 없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말이었다. 아이들은 편을 갈라 산타클로스가 진짜다 아니다를 두고 싸웠다. 나는 내가 마주했던 그 무서운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라 사람이 분장한 것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7살의 크리스마스 전날로 가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지 않아도 지금 내 옆에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분명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믿기로 했는데 그 순간 만큼은 산타클로스가 진짜라고 생각했다. 아마 산타클로스는 믿지 않지만 선물을 받고 싶다는 이중적인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눈을 뜨고 산타클로스를 마주 보면 산타클로스가 나를 나쁜 아이로 생각해 내 선물을 가지고 그대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걱정돼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아냈다. 나는 실눈을 뜨고 선물을 머리맡에 두고 가는 모습을 슬쩍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걸린 모습이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아빠라는 걸 알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내 생각이 맞아서 기쁘기도 했고, 반대로 아빠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지 않았던 것에 실망했던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점에서는 안심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7살 12월 24일 나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적어도 우리 집에 오는 산타클로스는 진짜 산타클로스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하지만 그 후 10살이 될 때까지 선물을 받기 위해 산타클로스를 믿는 척을 했고, 추가 3년 동안은 산타클로스는 믿지 않지만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는 것은 어린이의 권리라는 것을 내세워 당당하게 선물을 받았다.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조금 길게 중얼거렸지만, 이런 경험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경로와 시간은 달라도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산타클로스의 존재에 회의감을 가지고 산타클로스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은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당연한 순서이고 결과라고 여긴다. 아주 어릴 때 산타클로스를 부정하는 아이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성장한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진짜라고 믿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고 좋지 않다고 여기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의 믿음과 순수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들의 그런 ‘아이다움’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산타클로스를 상징하는 빨간 옷을 입고, 풍성한 수염을 달고, 커다란 자루를 들고 다니면서?

보통 어른들이 아이들의 ‘아이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하는 ‘아이 같은’ 접근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이 의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산타클로스라는 건 어린아이들을 위한 허구의 존재로 어느 시점에서 상상의 세계에 두고 나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내정한다.


결국 산타클로스는 어린 시절에만 존재할 수 있는 시한부 믿음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거다.


그런데 1897년 산타클로스의 존재에 대한 한 소녀의 질문에 ‘아이 답지 않은’ 방법으로 산타클로스라는 존재에 영원한 믿음을 주는 재미있는 편지가 있었다.

  


1897년 9월 21일.          


버지니아, 네 친구들이 틀렸단다. 네 친구는 의심 많은 시대를 살면서 회의론에 영향을 받았구나. 그러면 보이는 것만 믿는 법이지. 그 좁디좁은 사고방식으로 못 이해할 게 없다고 생각할 거란다. 버지니아,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은 모두 이해력이 그다지 좋지 않단다. 우리가 사는 이 거대한 우주에서 지능을 따지자면 사람은 그저 곤충, 개미에 지나지 않는단다. 끝없는 세계와 비교하고, 온 진실과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로 측정하면 말이야.


맞아, 버지니아, 산타클로스는 있어. 사랑과 너그러움과 헌신 만큼이나 확실하게 있단다. 너는 그것들이 세상에 넘쳐 흐르고, 네 삶을 아주 아름답고 즐겁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잖니. 산타클로스가 없다면 세상이 얼마나 쓸쓸하겠니. 너 같은 아이들이 없는 것만큼이나 쓸쓸할 거야. 그러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동심도, 시도, 설렘도 없겠지. 우리는 오직 감각과 시각에 의지해서만 즐거움을 느낄 거야. 어린 시절이 세상을 채우는 영원한 빛도 사라지질 테고.


산타를 안 믿다니! 그러면 요정도 안 믿는 게 좋겠구나! 네가 아빠한테 부탁해서 사람들을 고용한 다음에 크리스마스 전날 모든 굴뚝을 지키고 있다가 산타클로스를 잡으려 한다고 치자. 그래도 산타클로스가 내려오는 걸 못 봤다면, 그건 뭘 증명할까? 아무도 산타클로스를 못 보지만 그게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징조는 아니란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건 아이든 어른이든 볼 수 없단다. 요정이 잔디밭에서 춤추는 걸 본 적이 있니? 당연히 없겠지. 하지만 그게 요정이 없다는 증거는 아니란다.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세계의 불가사의를 전부 그려보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아기 딸랑이를 쪼개면 뭐가 안에서 소리를 내는지 보이지.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덮는 장막은 가장 힘이 센 사람이라도, 역사상 가장 힘이 셌던 사람이 전부 힘을 합쳐도 찢을 수 없단다. 믿음과 상상, 시, 사랑, 설렘만이 커튼을 열어 그 너머에 있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보고 묘사할 수 있지. 전부 진짜냐고? 버지니아, 이 모든 세상에 있는 건 전부 진짜고 실재란다.


산타클로스가 없다니! 다행히도! 산타클로스는 살아있고 영원히 산단다. 버지니아, 지금부터 천 년을, 아니, 지금부터 만 년을 열 번 한 거만큼 살면서 계속 동심에 즐거움을 선사할 거란다.         




위 편지는  1897년, 8세 소녀였던 버지니아 오한론이 뉴욕의 일간지 <더 선>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다.      

[버지니아가 보냈던 편지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님께,

저는 8살이에요. 제 친구 몇 명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대요. 아빠는 ‘<더 선>에 나오는 건 진짜’라고 했어요. 저한테 사실을 말해주세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있나요?

버지니아 오한론 드림.”]     


8살 소녀가 보낸 이 간단한 편지에 답한 아주 정성스럽고 어른스러운 이 편지는 나중에 <더 선>의 사설에도 실리게 되고 영어 신문 중 가장 많이 재판된 사설이 된다.


아무튼, 이렇게 영향력 있는 신문의 편집자가 어린아이의 아이다운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너무나도 ‘어른스러운’ 접근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하지만 흥미를 느낀 것과는 별개로 사실 처음 이 편지를 읽고 나서 “세상에!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어려운 편지를 쓰다니…. 이 편집자는 자신의 답장을 받아볼 사람이 8살 난 소녀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아이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쓰며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으니 존재하는 거라니!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편지였다.     


그래서 다시 편지를 읽어 봤다. 그리고 또 한 번 편지를 읽어 봤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편지는 정말 8살 소녀를 위해 쓴 편지일까?


편집자가 ‘진짜’ 이 편지를 쓴 이유가 궁금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건 아이든 어른이든 볼 수 없단다.’

몇 번이나 편지를 반복해서 읽는 동안 이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평소라면 헛소리, 혹은 신빙성 없는 근거에 기반한 오류 투성이의 비논리적인 결론이라는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건만,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왜 이 말이 신경 쓰이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마침내 계속해서 머릿속을 돌아다니던 생각이 편지의 다른 글귀와 연결됐다.

‘산타클로스는 있어. 사랑과 너그러움과 헌신 만큼이나 확실하게 있단다.’     

유치원에 찾아온 내가 무서워하던 산타클로스와 눈에 훤히 보이는 아이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영악함으로 매년 선물을 요구하는 나에게 한해도 빠짐없이 선물을 준 산타클로스가 생각났다.      


어딘가 김이 새는 느낌이 들었다.

편지가 말하는 산타클로스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산타클로스는 확실하게 존재했다.

이 나이가 돼서, 이제야 인정하는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로 ‘산타는 살아있고,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지가 실렸던 <더 선>에 대해 조금 설명하자면, 1833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에서 발행됐던 일간지로, 황색언론으로 유명한 영국 일간지 <더 선>이나 현재 뉴욕에서 출간 중인 <더 뉴욕 선>과는 다르다.

또한 <더 선>은 다방면에서 신문 역사의 전환점이 됐는데, 이전까지 신문에서는 정치 소식 또는 책이나 공연 평론을 주로 다뤘다. 하지만 <더선> 은 범죄는 물론 자살이나 사망, 이혼 같은 사건을 보도했던 최초의 신문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처음 다룬 신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 독자 제보에 주로 의존했던 다른 신문과 달리 기자가 직접 현장에 나가 이야깃거리를 수집해왔던 최초의 신문이기도 하다.



매주 한통의 편지를 보내드리는 <주간편지> 프로젝트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편지X에세이] 위대한 작가는 어떻게 탄생하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