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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카토 Jul 09. 2024

운 좋게 얻어걸린 산세바스티안

0705@San Sebastian

     

산세바스티안

        스페인의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an).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들의 유소년 축구 대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지도를 찾아보니 프랑스 남서쪽 국경 바로 옆에 있었다. 운전해서 가 볼만한 거리였다. 바스크 출신 선수들만 영입하는 걸로 유명한 바스크 순혈주의 축구 클럽, 아틀레틱의 도시, 빌바오(Bilbao)와 대서양 비스카이만(Bay of Biscay)의 휴양 도시 비아리츠(Biarritz)가 근처의 유명 도시였다. 주변 도시들도 둘러볼 겸, 산세바스티안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산세바스티안을 축구 대회나 겨우 여는 작은 시골 동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곳을 둘러볼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약 1,000개 팀의 예선 경기를 3일에 소화할 수 있는 산세바스티안의 축구 인프라

        물론 완전학 착오였다. 일단 아이가 참여한 축구 대회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대회 이름은 도노스티컵(Donosti Cup, 도노스티아는 바스크어로 산세바스티안이란 뜻이다). 10세부터 18세 유소년이 참가하는 대회였는데 아이가 참여한 12세 소년부 참가팀만 120개가 넘었다. 소년/소녀부 대회가 각각 열렸고, 미국 일본 등 참가국이 20개가 넘는 진짜 국제 대회였다. 더 놀라운 건 산세바스티안의 축구 인프라. 1,000팀이 넘는 참가 클럽들이 전부 산세바스티안 주변 축구 경기장에서 경기를 소화했다. 그만큼 산세바스티안은 크고 시설이 잘 갖춰진 부유한 동네였다. 이런 도시에 축구팀이 없을 리 없다.     


집집마다 걸려있는 레알 소시에다드 깃발

        산세바스티안의 축구팀은 레알 소시에다드(Real Sociedad). 이천수 선수가 뛰었던 팀으로 알려졌으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독점하는 스페인 축구 라리가에서 나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팀이다. 아틀레틱 빌바오처럼 순혈주의를 고수하지 않지만, 바스크 팀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클럽이다. (당연히 빌바오와는 바스크 지방 라이벌) 과격한 바스크 독립단체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열차 테러 등으로 독립을 요구했으니, 뉴스에서 한 번쯤은 봤던 것 같다. 역시나 검색해 보니 바스크족은 피레네산맥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네만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해온 독특한 민족이었다. 민족 정체성이 강할 수밖에.     


정작 프랑스 칸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래 해변들

         바스크 축구 유소년팀은 스페인 국기가 아닌 바스크 기를 들고 대회에 참가했으며, 빌바오와 레알 소시에다드는 보통의 축구 더비 팀과 달리 바스크 팀이란 자부심을 공유하며 서로 응원하는 사이라고 한다. 바스크인의 정체성은 그 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평균 소득이 스페인 전체 평균의 2배 가까이 된다. 그러니 마드리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사느니 당당히 독립을 요구하는 것일 터. 실제 산세바스티안 도심 풍경을 보는 순간 칸이 떠올랐을 정도로 도시가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해변도 환상적이다. 축구 대회 옆에선 재즈 페스티벌도 열리고 있었다. 아마도 도시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다양한 형태의 행사를 열고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서서 타파스+핀초를 맛보는 사람들

        스페인 여행의 큰 매력 중 하나가 타파스바에서 다양한 음식을 먹어 보는 일이다. 바스크 지방에선 타파스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쑤시개로 이런저런 음식을 고정해 빵 위에 올려 먹는 핀초(Pintxo)가 유명하다. 특히 올리브와 작은 고추, 절인 멸치를 꼬치로 만든 길다(Gilda)가 인상적이었다. 나처럼 채소를 싫어하는, 심지어 비린내 강한 절인 생선을 특히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아마 올리브유에 그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맛 없어 보이는 길다와 검은 올리브유를 뿌린 안초비 타파스

안초비라 불리는 멸치나 정어리를 빵 위에 올려놓고 먹는데, 신기한 건 역시나 비리지 않다는 점. 과일도 맛있었는데, 막내는 환타의 맛조차 특별한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만은.   

    

한국 전라도의 아름다운 섬들이 떠오르기도

        프랑스 도시들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역시나 산이 많다는 것. 한 번은 운전 중 길을 잘못 들어 산속 좁은 길을 지나게 됐는데, 마치 나르코스에 나오는 정글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실제 도심 전경을 찍으면 한국 전라도의 비금도가 생각날 정도로 산과 숲이 많다. 특히 이구엘도(Igueldo) 산이 관광객에게 유명하다. 산 정상으로 연결된 케이블카가 있을 정도다. 산 위에 올라가면 인천 바닷가에서 볼 법한 낡은 유원지가 나온다. 시시한 놀이 기구밖에 없지만, 유원지 자체가 고지대에 있어, 섬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후룸라이드와 깎아지는 절벽 아래로 돌진하는 청룡 열차를 탈 수 있다. 속도는 느려도 꽤나 스릴 있다.   

느려도 스릴 있는 이구엘도 산 유원지

  

        축구 대회에 참가한 아들 덕분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보석 같은 여행지를 알게 됐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사전에 정보를 찾고 오랜 고민 끝에 목적지를 정한 뒤, 치밀한 계획을 준비한 여행들은 보통 계획이 어긋나 짜증 나거나 때론 계획에 얽매여 일하듯 여행하다가, 결국 지쳐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여행뿐만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은 우연의 여신 앞에서 늘 망가지기 일쑤. 사실 이럴 땐 계획을 안 세우는 게 하나의 저항 수단이 될 수 있다. 혹은 느슨한 계획이랄지. 보통 내 인생에선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이 많은데, 이번 산세바스티안 여행이 딱 그랬다.   


운 좋게 얻어걸린 산세바스티안. 내내 맑던 하늘이 떠나는 날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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