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고는 라면 받침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학창 시절, 유일하게 읽었던 책 한 권 있었으니 바로 김영세 디자이너의 자서전 '이노베이터'였다.
"너 미술학원 다닌다며 이 사람이 유명한 디자이너래 이 책 읽어봐"
평소 책을 좋아하던 책벌레 친구탓에 얼떨결에 받아봤던 그 책.
사실 미대입시를 준비하면서도 딱히 디자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공부는 별로 하기 싫고 그림 그리는 건 그나마 재밌으니까 다녔을 뿐,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던가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야 이 책 살 돈으로 피시방을 쏘지 뭐하러 샀어 아무튼 읽어보긴 할게"
얼떨결에 받아온 책을 가지고 왔을 때 읽을지 말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도 그럴것이 책을 읽어본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 쌓인 책장에 그대로 직행하는 건 양심에 찔렸던 모양이었는지 일단 이 겉표지의 아저씨가 누군지는 알아보자며 책을 펼쳤다(사실 다음날 물어볼까 봐 걱정됐다). 휙 휙 훑어보던 페이지들 사이로 러프한 스케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애플이라 불리던 아이리버 제품의 스케치였다. N10이라는 목걸이형 MP3였는데 휙휙 넘겨지는 페이지 속에서도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옛날 학교에서 N10을 목걸이에 차고 다니는 건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몰래 듣기도 좋아서 나같이 책상위에서 잠만 자는 수면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잇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꼭 부모님을 졸라 사고 말리라 다짐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책 속에 그 제품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으니 다소 신선했다. 내가 접하던 제품들이 이런 스케치부터 시작해 양산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지라 내 눈에는 그가 '창조자'마냥 위대해 보였다. 그의 자서전에는 아이리버 MP3 말고도 라네즈 슬라이딩 팩트, 삼성전자 휴대폰, 동양매직의 가스버너 등 유수한 히트작들의 디자인 과정과 그만의 디자인 철학이 담겨 있었는데 , 그 이야기들은 마치 만화책 속 영웅의 서사시를 보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어서 하루 만에 다 읽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 읽었던 책이 이 책말고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괄목할 만한 독서량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곧바로 내 진로가 결정되었다. ' 나도 이런 간지 나는 걸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고 그는 그렇게 나의 히어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 가슴속에 없다.
그는 더 이상 디자이너가 아니다.
한때 나의 히어로였던 김영세는 내 가슴속에서 까맣게 잊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답은 간단하다.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가 설립한 디자인 에이전시 'INNO DESIGN'은 INNO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혁신과는 거리가 먼 기업이 되었다. 한때 애플과 자웅을 겨루던 디자인을 창조해내고 해외 유수의 어워드에서 상위권을 휩쓸던 에이전시가 이제는 과거의 명성을 먹고사는 그저 그런 기업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나를 가슴 뛰게 하던 그의 아이디어와 치밀한 분석력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유일하게 그를 볼 수 있는 곳은 각종 언론들이었다. 그곳들에서는 꽤나 뻔질나게 그를 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 사업영역을 넓히며 여러 강연과 방송에 출연하던데 내용은 2004년 그가 낸 자서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골 우려먹듯 과거의 영광에 취해 각종 미사여구를 뱉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속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의 히어로가 일개 사업가, 방송인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내가 정말 슬픈고 화나는 것은 그가 항상 디자이너의 탈을 쓴 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10년 동안 디자인 한 결과물들 중에 그의 철학에 부합하는 게 있는가? 얼마 전 그가 디자인 한 '샤블리에'라는 휴대용 드립기를 봤다. 최근 스타트업 열풍이 불면서 제조업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나온 결과물이다. 본인이 직접 디자인을 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길래 역삼동에 있는 매장에 찾아가 직접 제품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제품은 엉망이었다. 그 조악한 만듦새와 트렌드에 한참 뒤떨어진 조형성 거기에 더불어 촌스러운 상품페이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디자인은 여전히 2000년대 초반에 멈춰있었다. 한때 나에게 멋들어지게 느껴졌던 친필 사인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더 이상 그 어떤 권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개 이런 디자인을 갖춘 제품은 그 완성도 또한 떨어지기 마련이다. 펀딩 하는 사이트들을 찾아 들어가 봤더니 300%가 넘는 펀딩을 이뤘던데 그럼 무슨 소용인가? 코멘트에는 죄다 불평, 불만, 환불 요구들로 넘쳐있다. 놀라지 마라. 그는 신입 디자이너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자다.
그가 추락한 이유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감히 그의 머릿속을 생각하기에 그는 '디자이너'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취해 버린 것 같다. 애플의 성공이후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언론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 산업사회에서도 누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할 제품 디자이너가 필요했고 과거 김영세 디자이너는 그러한 조건에 충분히 부합했다. 그때부터 차곡히 잘 다져놓은 그의 입지는 지금까지도 그 영햑력을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올림픽 성화 디자인도 얻어내지 않았는가? 디자인에 대한 감각은 없고 네임벨류만 추구하는 눈먼 클라이언트들에게는 그가 조나단 아이브 마냥 보일지도 모른다. 어쨋든 네이버에 그의 이름만 치면 뭔가 많이 나오고 뉴스 기사도 많이 있으니까. 학벌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 덕분에 이노디자인은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 따위 사치가 되어버렸고 김영세의 후광 덕분에 클라이언트들은 줄어들지를 않으니 고인물에 빠져버린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디자이너로서의 열정을 잃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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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아니면 원래 비즈니스라는게 이런걸까. 확실한 건 그는 한때 최고의 위치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건 절대 과장이 아니었으며 언론 플레이도 아니었다. 그떄의 포트폴리오가 그를 증명하니까 말이다. 내가 가장 아쉬운워 하는것 중 하나는 그가 디자인한 스마트폰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영세만의 디자인 감각과 적절한 비즈니스 감각이 잘 버무려져서 나오는 제품은 항상 소비자들의 호기과 구매욕을 자극했기 때문에 요즘 같이 재미없는 몰개성한 스마트폰 디자인들을 보면 아주 가끔씩은 그가 그립다. 나의 이런 글을 보는일은 만무하겠지만 만약 보게 된다면 그때의 '그'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한떄 최고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