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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니엘 Caminero Dec 31. 2017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여행 이야기 - 7

Home, Sweet Home


‘나 어디 어디에서 살았다’라고 얘기할 수 있으려면 보통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은 한 지역에 체류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달 정도는 같은 곳에 거주했어야 살아봤다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적으로 내 마음이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렇게 기준을 내려 볼 수 있을 것 같고, 뭔가 감정적, 정서적으로는 그곳의 주소를 어느 정도까지 상세히 알고 있느냐가 ‘살았던 곳’의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서른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적어도 한 달 이상 머물렀던, 바다 건너의 곳들이 얼마쯤 되려나 궁금해졌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 주소지들을 근거로 추억을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Canada Ontario Scarborough Citadel Dr.

Canada Ontario Toronto College Street "Little Italy"
Canada British Columbia Vancouver Robson Street "Korea Town"

Argentina Buenos Aires Belgrano Virrey Arredondo

Brazil Amazonia Manaus Avenida General Rodrigo Otavio "Hotel Holiday Inn"
Brasil Amazonia Manaus “Residencial Eliza Miranda"


이렇게 6개의 지역이 내가 적어도 한 달 이상 살아봤던 거소지들이다. 도시로 치면 네 곳, 나라로 치면 세 곳이 될 것 같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삶을 살아왔고, 윤택, 부유, 풍족과는 거리가 먼 집안에서 자라온 곳을 감안하면 꽤나 독특한 이력으로 생각한다. 물론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들을 오롯하게 근면성실히 살아오신 부모님 덕분에 궁핍, 빈곤, 부족과도 적당히 거리 있는 삶을 살 수 있었기에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나의 방랑벽, 역마살 같은 것들이 더해져...) 뭐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곳은 아니고 그냥 내가 살았던 곳들에 대한 기억을 한 번쯤 한 데 묶어 정리해두고픈 마음이었다.

이미지 출처 = 구글 맵


먼저 나의 첫 해외 주소지였던 캐나다 토론토의 스카보로우(Scarborough). 스카보로우는 온타리오 주의 한 도시로 토론토 동부에 위치해 있다. 엄밀히 얘기하면 토론토는 아니고, 토론토 바로 옆 동네인데, 주소를 scarborogh로 써도, Toronto로 써도 거리 등 세부 주소가 정확하면 우편물이 날아온다. 안타깝게도 살았던 곳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타델 드라이브(Citadel Drive)라는 골목에 집이 있었다. 토론토 지하철 케네디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면 10분 안팎으로 닿을 수 있었다. 역에서 집까지는 가는 길에는 달러라마라는 1달러샵 같은 대형마트가 있었고, 작은 도서관이 두 개쯤 있었고, 인디아 식료품점, 세컨핸드 스토어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필리핀 이민자 가족의 집에서 3~4개월간 홈스테이를 했고, 브라질에서 온 키코 구에데스라는 친구와 하우스메이트로 지냈다. 키코는 거의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는 토론토 클럽과 갖가지 파티를 찾아다녔고, 일요일에는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살았다. 지금은 브라질에서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이어 받아 CEO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항상 레스토랑을 헤스토랑, 영국의 뮤지션 로비 윌리엄스를 호비 윌리엄스라고 발음하곤 했다. 심지어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도 헤비스라고 발음했다. 리바이스는 R도 아니고 L로 시작하는데, 왜 그렇게 발음했던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키코는 헤비스가 정확한 발음이라고 나에게 우겨대다 홈스테이 가족들로부터 정정 지도를 받았다. 히히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스카보로우에서는 서너 달 정도만 살고 집을 옮겼다. 당시 홈스테이에 드는 비용이 매월 700달러쯤 되었는데, 그 비용이 조금은 아까웠던 나는 메트로폴리탄 토론토에서 월세를 줄인다면 좀 더 많은 엔터테인먼트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 구한 집이 토론토 시내의 “리틀 이탈리아“의 지하실이었다. (리틀 이탈리아는 한인 타운이  있는 크리스티와도 매우 가까웠다.)

지하실에는 욕실이 하나 있었고, 작은 주방 겸 거실이 있었고, 방이 3개 있었다. 두 개의 방은 그 집에서 살고 있던 멕시코 청년들이 각각 하나씩 쓰고 있었고, 나는 빈 방 하나를 월세 200달러에 빌렸다. 방에는 두께가 15cm 정도 되는 낡은 매트리스만 하나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나 쓸 법한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계약서 같은 건 쓰지도 않았고,(지금 돌아보면 참 경솔했고, 위험했고, 바보 같았다.) 그냥 매달 정해진 날에 현금으로 200달러를 하산(아마도 아랍계 멕시코인)에게 건네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산도 그 지하실의 주인은 아니었고, 지하실을 통째로 빌린 다음 나머지 방 하나씩을 다른 멕시코 친구와 내게 임대한 것이었다.

집은 진짜 허름하고, 군대 생활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지만, 나는 이 때 줄인 500달러로 나름 문화생활도 즐기고, 원하는 매치업이 있을 때면 MLB, NBA, WWE도 심심치 않게 관전했다. 스티비 원더, 마룬 파이브, 마이 케미컬 로맨스, 린킨팍 등의 라이브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이 즈음 알게 된 친구들은 나를 돈 좀 있는 집 아들로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때 나는 가끔씩 생쥐가 출몰하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었다. (반지하도 아니고, 완벽한 지하였다!)     

집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만, 나중에 룸을 쉐어했던 두 멕시코 청년이 게이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은 상당히 공포스러웠다. 물론 두 사람의 성적 정체성이 어떠하든 내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알게 된 상황이 심각한 문제였다.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을, 굳이 알 필요 없던 것을 깊은 밤 옆방에서 들려온 어떤 소리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사운드 오브 러브가 아니라, 사운드 오브 페인이었다. 뭐랄까 사랑과 고통이 일정한 속도로 섞여 반복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날은 멕시코 친구들이 집에서 파티를 열게 되어 늦게까지 친구들이 놀러와 있을 거라면서  밤에도 조금은 시끄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나는 그 시끄러움이 그런 종류의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결에 들은 그 괴이한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욱이 당시 내 방은 문이 고장 난 상태였기에 그들과 그들의 특별한 친구들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했다거나 뭔가 좀 색다른 재미를 원했다면, 언제든 자유롭게 방문할 수도 있는 환경이었으므로 내가 느낀 공포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리틀 이탈리아에서 살며 경험한 가장 강렬한(좋든 나쁘든) 기억이다. 그밖에 저렴한 피자집에서 피자 한 조각과 소다를 3.99달러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즐기며 아침을 해결했던 것이나 가끔씩 혼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러 멋진 저녁을 먹었던 것,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재개봉관 극장 블루어 시네마에서 고전 명작들이나 개봉이 한두 달쯤 지난 영화를 절반 가격에 관람했던 것 정도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후 캐나다 생활을 정리할 때쯤 토론토를 떠나 잠시 밴쿠버에 머물렀다. 한인 타운 내에 있는 민박집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냈지만 별다른 기억이 없다. 한인 여행사를 통해 록키 산맥을 여행했던 것, 갖고 있던 돈이 거의 다 바닥나 하루에 한 끼를 먹으면서 생활했던 것, 왠지 모르게 몸이 지독히도 많이 아팠던 것, 옆방 커플이 밤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아무렇지 않게 지냈던 것이 생각난다.

죽일 듯이 싸운다는 게 그냥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랬다. 온갖 욕지거리가 고성으로 오갔고, 남자가 “내가 진짜 너 죽여버린다”라고 소리를 지르면, 여자는 “그래. 죽여라 죽여“라고 화답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토론토집 옆방 멕시코 게이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고통의 소리가 더 듣기 낫겠다 싶을 정도로 밴쿠버집 옆방 한인 커플들의 소리는 불편하고 불쾌했으며 여러모로 걱정이 됐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있는 동안 어느 누구도 죽지 않았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밴쿠버에서의 한 달 후 나는 몇 년간은 해외에 주소지를 둔 적이 없었다. 그러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오랜 꿈이었던 여섯 달의 남미 여행(여행이라기보다는 생활)을 위해 아르헨티나 브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났다. 먼저 벨그라노 대학에서 3개월 정도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남은 3개월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을 여행할 계획이었던 나는 벨그라노 대학의 어학원을 홈스테이 가정을 소개 받았다.
세자르 할아버지와 일다 할머니가 있는 노부부의 집이었다. 걸어서 7~8분이면 지하철역 에 갈 수 있어 통학과 시내 여행에 최적화된 아파트였다.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로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달릴라(?)’라는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 어느 정도 가까워지고 할머니로부터 자녀가 없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분도 결혼 후 여느 부부처럼 아이를 가졌는데, 태어난 딸이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였다. 당시 딸이 어떤 원인으로 숨을 거뒀는지는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고 하셨다. 그때의 충격과 슬픔이 너무 커서 두 분은 평생 아이를 갖지 않기로 뜻을 모았고, 시간이 지나 강아지 한 마리를 딸처럼 여기며 살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평소 반려동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달릴라를 제법 무서워 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녀석이 제법 고맙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언제나 그랬듯이 좋은 친구가, 좋은 딸내미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스페인어 생각만큼 쉽게 늘지 않아 두 분과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나의 식사는 거의 세자르 할아버지가 챙겨줬는데, 매일 아침 주방에서 혼자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는 나와 할머니의 아침을 차려놓은 뒤 출근하셨다. 저녁 식사 역시 퇴근 후 할아버지가 준비하실 때가 많았다. 아... 아르헨티나에서는 대개 저녁을 밤 9시쯤 먹는다. 홈스테이 첫 날 6시, 7시, 8시, 9시가 되도록 저녁을 준비해주지 않는 할머니에게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는지 물었는데, 할머니가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는 보통 7시 전후로 저녁을 먹는다고 했더니 할머니 역시 엄청나게 놀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헨티나에서는 보통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저녁을 먹는다고 하셨다. 그러면 점심을 12시, 1시쯤 먹고 저녁까진 아무 것도 먹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할머니께서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보통 밥을 하루에 네 번 먹는다며, 점심과 저녁 사이에는 메리엔다(merienda)를 먹는다고 얘기해주셨다. 남미에서는 보통 오후 4~5시쯤 커피나 티, 쿠키와 빵 같은 걸로 허기를 달래는데, 그것이 바로 메리엔다다.

개념상으로는 간식에 해당하고, 영어로도 ‘snack’으로 번역되지만 누구는 먹고 누구는 안 먹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관습처럼 지키고 있으니 끼니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거의 간식만 챙겨주시고, 보통 제대로 된 식사를 차려주시는 건 할아버지였다. 세자르 할아버지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꽤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SNS 메시지로 먼저 안부를 물어 오시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소식을 전해주시곤 하는데, 새해에는 내가 먼저 메시지로 안부인사를 드려야겠다.
     

이미지 출처 = 홀리데이인 마나우스


아르헨티나와 남미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나는 남미에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어진 두어 달의 시간 동안 신변을 정리한 후 브라질로 출국하게 되었다. 상파울루, 히우지자네이루, 이구아수 등은 여행한 적이 있었지만, TV나 책을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아마존강 유역의 산업도시로 떠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브라질 아마조니아의 무역 특구 마나우스에는 한국의 싼쑹기, 에레히 등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공장을 갖고 있다. 내가 1년 조금 넘게 일했던 회사는 홀리데이인 호텔과 계약이 되어 있어서 나는 취업 및 체류에 관한 공식적인 문서들이 모두 완비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무려 한 호텔의 한 객실에서만 4~5개월 동안 생활한 것이다.(한 달쯤 되었을 때 객실을 바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워낙에 장기 출장자가 많이 체류하는 이곳은 조식 뷔페에 김치와 컵라면을 거의 매일 준비해놓고 있었다. 브라질 사람들이나 타국에서온 여행자들은 김치와 컵라면이 올라오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싼쑹기는 해마다 수천 건의 숙박을 잡아주는 엄청난 고객이니 홀리데이인이 그것을 마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도 한국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컵라면을 먹어댔다. 그게 뭐 그리 좋다고.

5개월 가까이 지내긴 했지만, 대부분 아침 6시쯤 통근 버스에 올랐고, 퇴근 후 호텔방으로 복귀했던 시간도 거의 밤 10시 전후였기 때문에 호텔에 대해 특별한 기억은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좀 더 확실하게 홀리데이인 마일리지를 챙겼어야 했다는 거다. 멤버십 카드를 만든 후론 당연히 마일리지가 제대로 적립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체크해보니 전혀 조금도 쌓여있지 않았다. 거의 150박 151일 정도는 숙박했던 셈이니 잘만 챙겼으면 꽤 많은 포인트가 누적되었을 텐데, 살면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의 홀리데이인을 보더라도 흘려보낸 마일리지 생각이 간절해 안타깝다.


5개월여가 지나 브라질 노동부로부터 워크 퍼밋을 얻고 새 집을 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외관에 세대수도 많지 않은 소형 아파트였다. 건물은 4층까지 있었고, 전체 단지는 16개 동 아니면 32개 동 정도로 이뤄졌던 것 같다. 건물의 규모나 구조는 아파트라기보다 빌라에 가깝지만, 브라질 공동주택답게 단지에 꽤 큰 수영장과 슈하스께이라(바비큐 등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그릴, 싱크대, 테이블 등을 설치해놓은 간이 시설) 같은 편의시설이 있었다. 수영을 못하는 데다, 고기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

단지 초입 다리 밑에는 꽤 큰 하천이 있었는데, 악어가 두어 마리 살고 있었다. 주말 아침이나 낮에 외출을 하게 될 경우 가끔씩 악어들에게 먹다 남은 음식을 던져 주었다. 주로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식빵이나 크루아상 같은 것을 주었고, 덜 익어 맛이 좀 떫고 씁쓰름한 과일 따위를 떨어뜨려줬다. 엄청나게 큰 녀석들은 아니었고, 2~3미터쯤 되어 보였는데, 가까이서 본 것은 아니라 잘 모르겠다. 과거 쿠바여행 때 아기 악어를 안아본 경험도 있고, 아마존강 투어 때도 꼬마 악어를 만져본 적이 있어 악어 자체에 큰 거부감은 없으나 정말 2~3미터나 되는 놈들과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잠시잠깐 머물렀던 캐나다,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의 이런저런 기억들을 되짚어봤다. 한 곳, 한 곳 글로 정리하다보면 뭔가 특별한 경험들이 재생되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애초에 녹화된 필름이 그리 대단하지 않았던 것인지 별다른 추억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집이라는 대수롭지 않은 공간에서 뭐 얼마나 특별한 일들이 벌어지겠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옆방에서 들려온, 두 게이 친구들이 만들어낸 사운드 오브 페인만큼은 명명백백히 특별한 것이었다. 내 평생 그런 소리를 다시 들을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 나는 그때 그 경험을 통해 게이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고통을 주고 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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