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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니엘 Caminero Jan 23. 2018

응답하라 1998! K리그 르네상스

20년 전 그라운드에서 찬란히 빛나던 그때 그 별들의 Now & Then


많은 축구팬들이 1998년을 한국프로축구 K리그의 르네상스로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K리그 트로이카'로 불린 고종수, 이동국, 안정환 세 명의 슈퍼스타들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때였으며, 그들을 위시하여 수많은 영플레이어가 등장했고, 오빠부대를 거느린 선수들이 구단마다 서너 명은 있을 정도로 과거와는 다른 팬덤이 형성된 시기였다. 당시 정규 리그는 10개 클럽이 경쟁하며 팀당 18경기만을 치렀음에도 프로축구 단일 시즌 최초로 200만 관중 시대를 열었고, 평균 관중 역시 15,000명을 상회할 정도였으니 1998년을 K리그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보는 시선은 매우 보편타당한 셈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2018년에 와서도 여전히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당시를 수놓았던 별들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건 당대의 인기 선수들이 가진 캐릭터가 꽤나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는 고유명사와도 같은 닉네임이 있었으며, 각기 다른 나름의 수식어가 뒤따랐다. 단순히 실력을 떠나서 개성 넘치는 플레이스타일과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흔히 말해 '스타성'을 가진 선수들이 리그 내에 차고 넘쳤던 시기였다. 앞으로 이 시절을 넘어서는 중흥기가 K리그에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프로축구 최고의 '화양연화', '리즈시절', '프라임타임'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20년 전 아이돌 팬덤은 음악방송이나 콘서트장뿐만 아니라 축구장에서도 제법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즈음부터 제대로 축구장을 찾아 리그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했던 것 같은 기억이 든다. 그 전에도 드문드문 프로축구를 관전한 적은 있었지만, 별다른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빈번하게 K리그 경기를 관전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사이에도 리그에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1998 K리그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축구장의 열기와 팬덤이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크게 확장되었고, 월드컵 폐막 후 K리그 후기리그까지 어느 정도는 비슷한 분위기가 낯설지 않게 이어졌다. 그 5년이라는 시간은 K리그와 한국 축구에 있어 매우 특별했다. 


나는 갑자기 1998년(그리고 1999년, 2000년 즈음)에 활약했던 과거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때 그 선수들은 지금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현역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도 있고, 이제는 TV를 통해 더 자주,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선수도 있고, 지도자로서 제2의 축구 인생을 걷고 있는 선수도 있다. 혹시 축구를 떠나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선수는 없을까? 다들 건강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드는 건, 어린 시절 내게 커다란 즐거움을 줬던 왕년의 형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나에게 축구의 매력을 전해준 그 시절의 풋볼러들이 모두 안녕하게 잘 지내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쓴다.

 

별다른 기준 없이, 그저 내 멋대로 당시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전국구', '준(準) 전국구', '지역구'로 나누어 정리해본다. 한 축구팬의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일 뿐이니 어느 정도 너그럽게 대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터라 많은 것을 팩트에 기반하여 작성한 글이 아니라, 이미지와 추억에 근거해 적어내려간 것임을 감안해주시길...(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나 뭔가 좀 거슬리는 표현이 있다면 댓글로 수정 요청 남겨주세요. 최대한 빨리 수정해놓겠습니다! 그리고 이 멋진 선수들의 수려한 자태가 담긴, 퀄리티 좋은 사진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 전국구 ( 고종수 / 이동국 / 안정환 )

  

고종수(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 aka "앙팡 테리블"


당시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초딩 팬을 보유했던 선수가 바로 고종수 아닐까 생각한다. 딱히 근거가 될 만한 데이터는 없다만, 함께 트로이카를 이뤘던 이동국, 안정환과는 다르게 초등학생들이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기억이 있다.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무서운 아이)'이라는 별명 때문일까, 특유의 개구쟁이 이미지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애들이 참 좋아한 선수였다. 아...아무래도 텀블링 셀러브레이션이 한몫을 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하더라도 공중제비 세리모니는 나이지리아나 카메룬 선수들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니. 

그는 다른 두 선수에 비해 팬덤의 연령대가 더 넒었으며, 남녀팬이 고르게 많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팀 내에서 세트 피스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시그니처와도 같은 예술적인 프리킥 골들을 수차례 터뜨리며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동국, 안정환이 데뷔한 1998시즌부터 K리그 트로이카를 형성했지만, 그보다 두 시즌 앞선 1996년, 18세의 나이로 데뷔. 이미 스타덤에 올라 있던 '젊은 베테랑' 플레이메이커였다. 2018 시즌부터는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 K리그팬들을 만나게 된다. 이제 대전은 골키퍼부터 센터포워드까지 스쿼드 내 모든 선수들이 프리킥 능력을 장착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된다.


이동국(당시 포항 스틸러스) aka "라이언킹"

 

1998년 고교졸업생 이동국이 신인왕을 거머쥐며 K리그에 화려하게 데뷔했을 때 그가 2018년에도 현역 선수로 활약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 이들이 얼마나 됐을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19세의 나이로 유럽 최강 네덜란드와 겨뤘던 그가 38살의 나이로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출전할 거라고 상상한 이들은 또 얼마나 됐을까? A대표팀, U-23 올림픽 대표팀, U-20 청소년 대표팀을 오가며 맹활약했던 풋풋한 소년 스트라이커는 아직도 그라운드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의 미소에 설렜던 수많은 소녀팬은 이제 아이 엄마가 되어 더 이상 축구장을 찾지 않으나, 5남매의 아빠가 된 이동국은 여전히 K리그에 남아 있다.

한 때는 불운, 부상, 부진, 실패 등 부정적인 낱말이 꼬리를 무는 그였지만, 2009년 전북 현대 모터스라는 최고의 클럽과 최강희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다. 제2, 제3의 전성기를 넘어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음에도, 아직 마침표를 모르는 그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몇 해 전부터는 출전시간이 점점 줄고 있으며, 득점력도 다소 떨어지고 있는 그를 현 시점에서 K리그 최고의 선수라고 추켜세울 수는 없겠지만, K리그 최고의 스타 자리만큼은 여전히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스타성을 위협하는 경쟁자는 소속팀 전북에도, K리그 전체를 뒤져봐도 쉬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그의 전설은 올해도 전주성에서 새로운 챕터로 이어진다.


안정환(당시 부산 대우 로얄즈) aka "테리우스"


1998년부터 2018년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 안정환. 정확히는 1997년 시칠리아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부터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1998년 프로축구 데뷔 시즌이 아닌 1997년 유니버시아드 대표 때부터 그의 팬이었다는 사실이 괜스레 뿌듯하다. 이미 고등학교, 대학교 때부터 축구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선수였지만, 보통의 축구팬들보다는 1년 먼저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시칠리아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이탈리아에 맞서는 안정환을 보며 언젠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선수가 될 거라는 확신 가득한 예감이 들었다. 출생시기가 애매해(?) 1996 애틀란타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선발되지 못했으나 그의 재능은 이내 K리그를 바탕으로 쇼케이스되었다.

30대 중후반의 내 또래 축구팬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로 안정환을 꼽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만들어낸 엄청난 순간들을 우리는 수차례 목격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라운드에서의 옛 모습보다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친근한 모습이 더 익숙하게 다가오지만, 안정환은 틈틈이 각종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하며 시나브로 축구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U-17 정도의 청소년 대표팀에서 그의 코칭 커리어가 시작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어린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들에게 전수해줄 부분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한 안느턴과 그 예술적인 칩슛을 포함하여...패키지 여행도 다닐 만큼 다니고, 연예인들 냉장고도 들여다볼 만큼 들여다봤다고 여겨지는 때가 오면 그는 분명히 다시 그라운드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뢰브, 무리뉴, 과르디올라 못지 않게 수려한 감독님을 가질 수 있다.
 

이쯤에서 보고 가는 막간 코너 '안느의 그 때 그 얼굴'... 더 잘 나온 사진도 많이 있지만, 경기장에서 찍힌 사진들로...




# 준 전국구 ( 김은중 / 박성배 / 장대일 )
 


김은중(당시 대전 시티즌) aka "샤프"

김은중도 트로이카 3인에 못지 않게 많은 팬을 보유했던 선수였다. 냉정히 말해 어느 정도의 격차는 있었지만, 세 선수에 김은중까지 포함해 '4인방', '4대천왕' 등으로 수식하기도 했고, 1996년에 데뷔한 고종수를 논외로 하고 이동국, 안정환, 김은중을 3대 라이징 스타로 꼽는 이들도 있었다. 김은중은 청소년 대표 시절 이동국과 상호보완적인 플레이로 영혼의 투톱을 이루면서 축구팬들의 기대를 모았고, 대전 시티즌에 입단해서도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대전 시티즌이 신생 구단에 당시 프로축구 사상 최약체로 꼽힐 정도의 팀이었던 탓에 공격력이 매우 빈약해 2000 시즌 이관우의 합류 전까지는 많은 골을 터뜨리진 못했다.

하지만 '샤프(sharp)'라는 별명처럼 날카롭고 영리한 움직임을 보이는 스트라이커였다. 이동국, 설기현 등 동년배 포워드들과는 달리 피지컬을 무기로 삼지 않고,  한 템포 앞선 선택, 정확한 타이밍 판단으로 득점 기회를 창출하는 다른 유형의 공격수로 주목 받았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학창시절부터 한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반 실명 상태로 꽤 오래 선수 생활을 해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축구팬들이 크게 놀랐다시력에 문제만 없었다면 훨씬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선수라고 생각한다. 연령별 대표팀에서는 꽤 중용되었지만, 성인 대표팀에서는 별다른 활약상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현재는 U-23 대표팀의 코치로 김봉길 감독을 보좌하며 아시안 게임을 준비하고 있다.

박성배(당시 전북 다이노스) aka "흑상어"


박성배는 잘생긴 외모나 훈훈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선수였지만, 저돌적인 플레이스타일로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인기를 끌었던 전북의 공격수였다. 측면공격수, 센터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공격자원이었다는 점에서 안정환과 유사하지만, 테크닉보다는 터프한 몸싸움과 과감성으로 수비진을 파괴하는 선수였다. 이동국, 고종수, 안정환이 주연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1998 올스타전에서 환상적인 감아차기 골을 터뜨리며 박성배라는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1998 시즌 데뷔 후 전북에서 3시즌 연속 10골 이상의 득점과 15개에 가까운 공격포인트를 수확하는 생산성 있는 포워드였다. 김도훈의 파트너 역할도 잘 소화했지만, 혼자서도 해결이 가능한 훌륭한 피니셔였다. 하지만 2001 시즌부터 득점력이 급감하며 팀에서 자리를 잃어갔고, 수원에서 뛴 2007년을 끝으로 K리그와 작별했다. 뉴질랜드 세미프로리그와 내셔널리그에서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지도자 인생을 준비했고, 현재는 U-18 청소년 대표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장대일(당시 천안 일화)


장대일은 연세대 재학시절, 차범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A대표팀에 합류해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출전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대학 축구에서는 제법 유망한 선수였으나 당시만 해도 연령별 대표 경력이 전무했던 그를 발탁한 차범근 감독의 선택에 의구심을 갖는 이들도 많았다. 2 대 0으로 패했던 한일전을 제외하고는 출전한 경기 대부분에서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 향후 홍명보의 뒤를 이을 중앙수비수로 기대를 모았으며, 1998년 천안 일화를 통해 K리그에 데뷔한다. 영국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얀 피부와 서구적인 외모를 가졌던 그는 최초의 혼혈 국가대표 선수로 알려졌으며, 한 해외 언론을 통해 1998 프랑스 월드컵 미남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센터백이지만, 공격수 출신 답게 세트피스 상황에서 공격에 적극 가담하여 가끔씩 골을 터뜨리기도 했으나, 팬들의 기대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고 2000 시즌 천안을 떠나 연고지를 옮긴 성남 일화처럼 역시 팀을 떠나된다. 부산에서 주전급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를 잡는 보였으나 잦은 부상 등의 문제로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하고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커리어를 마감했다. 은퇴 엔터테인먼트사와 계약해 연예인으로서 새 인생을 시작했으나 많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고, 2008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아마추어 리그인 K3를 통해 선수 생활을 재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후 소식이 뜸해졌고, 축구선수로 복귀했다는 소식 역시 이미 10년이나 이야기로 현재의 근황을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은 축구와 거리를 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 지역구 ( 백승철 / 정광민 / 임관식 )

백승철(당시 포항 스틸러스)


백승철은 1998년, 1999년 단 두 시즌만을 뛰고도 K리그를 대표하는 캐넌슈터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심각한 무릎 부상과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의료사고라는 불운으로 인해 3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프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었지만, 슈팅력만큼은 K리그 사상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단기간에 보여준 임팩트 역시 '역대급'으로 형언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태극마크 프리미엄이 있었던 팀 동료 이동국에게 신인왕 타이틀은 내줬지만, 1998시즌 베스트 11 MF 부문에 선발되어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상 경력이었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세컨드 스트라이커(당시에는 이런 표현의 쓰이지 않았던 것 같지만)를 맡아 포항 공격진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으며, 벼락 같은 중거리슛은 스틸야드를 찾은 팬들의 가슴을 언제나 뻥 뚫어줬다. 곱상한 모법생 이미지에 체격 조건도 그렇게 빼어나지 않았던 그가 어떻게 그런 미사일을 쏴댔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놀랍다. 그 즈음 포항 팬들은 이동국과 백승철이 황선홍-라데 투톱의 뒤를 잇는 콤비로 오래 오래 K리그를 호령할 거라고 기대했을 텐데 이동국은 이제 녹색 유니폼이 더 잘 어울리는 선수가 됐으며, 백승철의 그 엄청난 슛들은 팬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재생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그는 경주의 위덕대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정광민(당시 안양 LG 치타스)

아쉽다. 정말 아쉽다. 치렁치렁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그의 멋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더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인가? 한 7,8년 전만 해도 N이든 D든 G든 인터넷에서 조금만 시간을 들여 검색하면 정광민의 안양 LG 치타스 시절 사진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 많던 사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정광민' 하면 나오는 이미지라고는 대개 해이해진 마음을 다 잡고 구단에 복귀해서 찍은 삭발 상태의 증명사진 따위라서 매우 안타깝다. 정광민도 분명 1998 K리그 르네상스에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는,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라이징 스타였는데 말이다. 가끔씩 생각지도 못했던 먼 거리에서 원더골을 터뜨리기도 하고.
정광민은 안정환과 같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긴 머리에 잘생긴 외모까지 그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1998년 안양 LG 소속으로 K리그에 데뷔해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1999년, 2000년에도 괜찮은 퍼포먼스를 이어가며 팀의 간판 스타로 올라섰고, 2000년에는 2002 한일 월드컵 개최 기념으로 열린 한일 올스타 대 세계 올스타의 이벤트 매치에 출전하기도 했을 정도로 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또한 히딩크 감독이 부임 초기 대표팀 멤버로 소집해 관심을 갖고 테스트했을 만큼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였지만, 구단과의 마찰로 인한 임의탈퇴과 현역 입대 등 우여곡절로 인해 커리어가 꼬여버리고 말았다. 현재는 경기대학교 감독으로 U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임관식(당시 전남 드래곤즈)


직업 군인이 되었다면 이름 때문에 주위로부터 꽤나 장난을 많이 당했을 것 같은 임관식은 1998년 K리그에 데뷔한 전남 드래곤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데뷔 첫 해부터 주전급 선수로 활약하며 전남의 중원 한 자리를 차지했고, 간헐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강력한 슈팅력을 뽐내기도 했다. 작은 체구임에도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을 소화하는 데 무리가 없었고, 빠른 판단력으로 상대 공격진의 패스 줄기를 사전에 차단하며 팀의 공수전환을 이끌었다.
축구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전남이라는 클럽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선수였으며, K리그 르네상스에 주목 받은 대부분의 신진급 선수들과는 달리 수비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면서도 이름을 알린 의미 있는 케이스였다. 무엇보다 프로의식이 돋보인 선수로 K리그에서 10년 넘게 활약하며 커리어 내내 수비에 중점을 둔 플레이를 펼치면서도 통산 퇴장 기록이 단 1회에 불과할 정도로 깨끗한 매너를 선보인 프로페셔널이었다. 은퇴 후 K리그와 대학 무대를 오가며 코칭 스태프로 활동한 그는 최근까지 아산 무궁화에서 코치로 활약했으며, 자신이 선수로 활약했던 클럽(전남 드래곤즈)과 모교(호남대학교)에서 지도자 커리어까지 경험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미지 출처; 프로축구연맹, 수원삼성블루윙즈, 대전시티즌, 포항스틸러스, 전북현대모터스, 부산대우로얄즈, JTBC '뭉쳐야 뜬다', 대한축구협회, B엔터테인먼트, FC서울, 전남드래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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