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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Dec 18. 2023

[한국철학과 녹색] 잘 살아가는

2023.9.5

오랜만에 말을 건넨다.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물으면 잘이 뭘까 싶다. 근황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면 꼭 잘만 살아간 것은 아닌데, 왜 잘 지냈다고 말하게 되는 걸까. 아무래도 희망을 찾는다면 이 지점에 있을 것 같다. 기후위기인데도 가을의 하늘이 푸름을 보여주는 것처럼, 장례식장에서 돌아간 이와의 추억을 말하며 웃는 것처럼. 잘 지내지 못해도 잘 지내는 순간은 있다. 여하튼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길었던 휴재의 시작은 2022년 10월 30일 작년 내 생일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즈음서부터 뭔가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참 황망하게도 돌아갔다. 어떤 죽음은 우리를 그 전과는 분명 다르게 바꿔놓는다. 분노에 차 거리로 나갈 수도 있고,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분석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대개 원인을 찾거나, 책임을 묻거나, 대책을 만들려 애쓴다. 귀한 시도이자 수고로움이지만, 왠지 덧없게 여겨졌다.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지만, 사회적 애도는 중요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나는 진정 죽음을 마주하고 애도하고 있을까.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마음이 남았다. 이 마음과 부대껴 살아가니 어느덧 올해의 늦그막에 접어들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얼마 전 돌아간 내 스승이라면 이를 가난의 마음이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1] 빈곤과는 엄연히 다른, 생의 다사다난함과 희노애락을 마주하고,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도 않고 내려놓는 마음이라고. 여러 죽음들이 계속 아른 거리는 것을 보니,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죽음에 대한 것인 것 같다.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막 49재가 지나갔다. 할머니가 재가 되기 전에 얼굴을 뵈었다. 태어나고 가장 많이 울었다. 엄마와 아빠, 동생을 함께 부여잡고 울었다. 할머니가 선물처럼 가족을 주고 간 것 같았다. 시골의 뒷산 산소에 할머니의 꼬부랑 친구들과 원수들이 지팡이를 짚고 유모차를 끌고 오셨다. 꼬깃꼬깃한 봉투에 부조를 건네고 잘 일어서지도 못하시는데 절을 하며 곡을 하셨다. 여러 슬픔과 애도 사이에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참 귀하고 중하다 생각했다. 모든 생명이 어김없이 태어나서 죽어간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이 사실을 자주 잊는다. 수많은 것들에 매여 가장 중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잊고 피하고 살아간다. 난 잘 살아가고 싶다. 잘 안 살아도 되니까, 잘.


나의 할머니, 박정순은 1929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초등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스무 살 시집을 온 지 반 년 만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의 말과 삶에서 나는 이따금 묵묵히 수십 년을 농사지으며 살아온 겸허하고 치열한 농부의 모습을 보기도, 광화문 광장에서 뵙는 태극기 할배할매를 떠올리기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쌀과 고추와 식혜를- 주는 할머니를 보기도 했다. 정말이지 우리 시대와 사회는 고작 백 년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너무 크고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백 년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미증유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좀 뒤에 서울에 폭격이 떨어지는 생생한 꿈을 꾸었다. 올 게 왔구나 하는 섬뜩한 섬광과 처참함 속에서 할머니 생각을 했다. 자주 가려지지만 당장 내일 전쟁이 나도 어색함 한 점 없을 정도로 전운이 감돌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던 날을 기억한다. 말로 평화를 이루지 못한 좌절의 경험이 이 현대사에는 얼마든지 있고,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조건과 생태적 한계는 가깝거나 먼 전쟁의 가능성을 담고 있으므로[2]. 아마 나는 끝끝내 할머니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희망은 발굴의 영역인 것 같다. 잘 지내서 잘 지낸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대가리 꽃밭으로 기뻐서만 웃는 게 아니고, 기후위기 같은 게 거짓말이라서 가을이 이리 찬란한 게 아니다. 전쟁이 평화를 키우고, 죽음이 생명을 말하며, 절멸이 녹색을 살리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 시대의 표정으로 보고 싶다. 이 행성이 끝나도, 내일 당장 전쟁이 나도, 이 생에 맺는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면서, 좀 더 자주 웃으려 한다. 그게 우리 철학과 녹색에 있는 힘인 것 같다. 막 순례를 떠난다. 기다려준 분들께 감사를 표하며, 견문으로 은혜를 이어보겠다.  



정성과 평화를 담아,

인왕산 앞에서 윤석 드림


[1] 신승철, 2021, 기후위기 시대 마음의 생태학, 생태전환매거진 『바람과 물』 1호 기후와 마음 “탈성장 전환사회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 연결의 마음, 연대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가난해질 때, 우리는 온갖 가식과 허위를 벗고 마음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후위기 상황에 입체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다시 나누어볼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날 것이다. 희망은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져버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작은 목소리지만 여전히 울림이 되는 마음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 허수경, 2005,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 지성사. “시인의 말 /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반 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들이 크고 작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


*이 글은 2023년 9월 5일 다른백년의 [한국철학은 녹색]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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