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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Dec 18. 2023

[한국철학과 녹색] 좋은 길 위에서

2023.11.28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 우리말로 좋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을 한 달간 주고받으며 매일 걸었다. 여기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길이다. 1500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이 길을 찾아왔다. 성 바울의 유해가 발굴된 그리스도교 성지로서의 순례가 주된 이유겠지만, 종교적 이유든 아니든 간에 몇백 키로미터의 길을 오롯이 걸어가는 데는 고유한 이유가 있겠다.  


길을 걷다 만난 이들에게 매번 까미노를 온 목적이 뭐냐고 물었는데, 목적 같은 건 없지만 계기나 맥락 정도는 있다고 답을 들었다. 순례가 소원이었다는 사람부터, 생의 전환점을 바라볼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람, 그냥 트레킹을 좋아하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서 온 사람, 소중한 이를 잃어서 걸어야만 했다는 사람까지 이유는 다양했지만, 왠지 공통된 뭔가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첫날 피레네 산맥의 초입에서 만난 중국계 미국인 데이빗은 한 주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이 길을 걸을지 몰랐다고 했다. 그는 가방에 담아온 형의 유해를 산 정상에서 뿌렸다. 나는 그의 옆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염불을 외며 내가 마음에 담아온 분들을 생각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은 왜 길을 걷고 싶어하는 걸까. 내게도 함께한 물음, 답 같은 게 있을 리 없지만 길을 걷는 내내 눈에 띄었던 돌무덤들, 함께 적힌 추모와 애도의 글귀들은 위안으로 남은 것 같다.


길은 사실 별 게 있지는 않다. 피레네 산맥과 칸타브리아 산맥이 조금 험한 걸 제하면 대부분은 그냥 넓게 펼쳐진 스페인 시골길이다. 시골 마을 작은 성당과 종소리 같은 것이 아른거리는데, 오늘은 걸으며 기억에 남았던 몇 순간을 적어볼까 한다. 




바닷가가 있는 북쪽 길 해안가 도시 라레도의 어느 오래된 수녀원 알베르게에 묵을 기회가 있었다. 아침에 수녀님들은 교회의 한 방에 둘러앉아 찬트를 불러주셨다. 이분들은 여기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찬트를 불러온 것일까 생각했다.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는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나는 자장가에 스르륵 잠에 빠져들 듯이 그 노래를 들었다. 이어서 돌아가면서 메시지들을 읽었던 것이 남았다.


<I want to be your pilgrim, Lord 주님, 당신의 순례자가 되고 싶습니다>

Do not let me wander aimlessly, 제가 목적 없이 돌아다니지 않을 수 있게 하소서
I want to be your pilgrim, 당신의 순례자가 되고 싶습니다
with a goal, a sense 그곳을 함께
to walk through life 인생을 살아가는 감각과 함께
with a future to dream 꿈꿀 수 있는 미래와 함께

If I am tired, 제가 지친다면
you will remind me 제게 일러주세요
“Come to Me all you who are “너희 모두 나에게 오라
weary and burdened 피로하고 짐 진 자들이어
and I will give you rest” 내가 안식을 주리라”

If I am thirsty, 제가 갈증에 시달린다면
You will give me living water, 생명의 물을 나누어 주세요
When I’m disoriented, 제가 방향을 잃는다면
You’ll whisper to me: 제게 속삭여 주세요
“I am the Way, 내가 길이고
the Truth and the Life” 곧 진리이고 생명이라”

You bless me when I come up 당신은 축복해 주셨지요
to the poor feed them, 제가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갈 때
because You are in them. 당신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You repeat: “Do not be afraid” 당신이 반복하기를, “불안해하지 말라”


이튿날 폭우가 쏟아지는 사이 절벽 길을 걷고 난 뒤 더 발걸음을 옮길 힘이 없을 때 그곳에 도착했다. 구에메스의 공동체 알베르게의 입구에는 환대가 스페인어로 적혀있었다. 이곳의 숙식은 기부제로 이루어지는데, 처음에 운영하기에 충분한 돈이 모아질까 의문이었지만 그 의문은 곧 사라졌다. 맛있는 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 호스텔러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식사 맛있게 잘하셨나요? 이 식사를 주신 신과 오늘의 봉사자들께 감사합니다. (박수) 이 식사는 어제의 순례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기부한 돈으로 마련했습니다. 괜찮으셨다면 내일의 순례자들께 드릴 음식을 위한 기부를 부탁하겠습니다.” 맛난 밥과 취지에서 일어난 감동의 물결은 기부 행렬로 이어졌다. 마음이 동한 이들은 자원봉사자로 공간에 남기도 했다. 이곳은 이런 식으로 20년 이상을 운영해오고 있었다. 이런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가는 이들은 어떤 심정일까. 알베르게의 중간에는 원형의 몽골 게르처럼 생긴 장소가 있다. 호스텔러 할아버지는 매일 모두가 자는 시간이 될 때까지 그곳에 앉아계신다고 한다. 누가 오면 짧은 대화를 나누고 다시 잠에 들 듯 지팡이를 짚고 묵상에 들었다. 양치를 하다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양칫물을 삼키고 같이 기도를 드렸다. 이 길에 누가 오고 누가 만들어 가는지 엿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몬드라곤과 바르셀로나[1] 


순례길을 걷던 도중 몬드라곤, 이곳 바스크어로 아라사테(Arrasate)라는 도시에 가게 되었다. 한국에도 빌바오-몬드라곤의 성공담과 호세 마리아 신부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는 편인데, 세계 사회적 경제의 3대 메카로 불리지만 막상 별 게 있지 않다. 물론 인상적인 장면은 많다. 협동조합임에도 규모 있게 성장해 스페인 재계 10위 안에 있다는 점, 금융위기나 팬데믹에 다른 기업들이 철렁할 때도 이 경영체는 살아남았다는 점, 구성원들이 전체 협동조합의 경영에 참여하는 의사결정구조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간다는 점 등. 거창한 성공담이 생경하게도 실은 몬드라곤은 서울의 한 구 크기가 될락 말락 한 작은 도시였다. 스페인에 처음 들어오고 다른 곳도 좋았지만 이곳이 유난히 마음에 들었다. 도시의 한 중앙 광장에는 놀이터가 있고,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뛰놀고 있었다. 일요일도 아니고 평일 오후인데 놀러나온 가족으로 분주했다. 광장에는 턱이 없고 유난히 휠체어가 눈에 띄었다. 시내의 작은 상점들과 가게에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라 다양한 중소 조합들의 생필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유독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람들의 걸음은 느긋하고, 젊은 이들의 생기가 느껴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곳곳에서 들렸다. 비결이 무엇일까. 어쩌다 들린 마을 도서관에서 찾은 사진집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마을의 약 100년이 시간순으로 담겨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전승과 혁신이 보였다. 마을이 커져가는 가운데 인근의 생태적 한계를 크게 해치지 않고, 노동환경과 교육 및 복지 등 사회적 기초를 잘 다져간 것이 보였다. 초기의 연대와 협동의 정신을 잘 이어왔구나 싶었다.[2]



순례길을 마치고 들린 바르셀로나도 그렇다. 바르셀로나는 ‘두려움을 모르는 도시(Fearless Cities)’ 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후 정책의 선두 도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생태사회주의자 사이토 고헤이는 바르셀로나를 탈성장 코뮤니즘의 선두 도시로 평가하기도 했는데, 도시가 2020년 1월 발표한 기후비상사태선언은 2050 탈탄소화 목표와 5가지 행동영역 242가지 실전조치를 200개 남짓한 단체의 300명이 넘는 시민이 구성한 기후비상사태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집필되었다. 현재 바르셀로나가 추진하고 있는 슈퍼블록 정책은 공공공간을 차량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변화하기 위한 새로운 도시계획 전략으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더하여, 생태경제학자인 요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와 제이슨 힉켈(Jason Hickel)을 필두로 2020년 최초로 바르셀로나 자치대학에 탈성장 대학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커리큘럼은 생태경제학과 정치생태학, 남반구의 관점과 탈식민주의에 기반한 페미니즘과 돌봄 경제 인류학이 그 축으로 구성된다. 이 교육 과정은 3년 차를 맞은 지금 사전 모집이 마감될 정도로 성화를 받고 있다. 직접 들려본 대학의 교정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페미니스트 대학 선언, 생태적 대학을 위한 각종 운동이 보였고, 최근에는 새로 일어난 전쟁에 대한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 지역이 각기 다른 영역과 면에서 대안이자 희망으로 떠오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 지역들은 언어 자체가 다를 정도로 각기 지역의 고유한 문화색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빌바오-몬드라곤이 있는 바스크 지역은 바스크어를,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역은 카탈루냐어를 쓴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도 한국에 비해 잘 분산되어 있고, 얼핏 본 바로 지역 내 긴장은 건재하지만 그 관계가 분쟁보다 발전적 경쟁을 띄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위로는 유럽 아래로는 아프리카, 옆으로 중동이 있는 이 묘한 중첩된 지역에 드리운 다양성이 지역 내 전환의 거름이 되고 있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 콜럼버스 데이를 국경일(Fiesta Nacional de España)로 지정해 축제를 이어가는 모습에서는 질문이 남았다. 일부 스페인과 아메리카 대륙 진보 진영 각지에서는 제국주의의 시작일을 기념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이 날을 선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실은 각기 살펴보면 모두 어려운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슬람 침공 혹은 전쟁에 있어 북부를 규합하기 위한 종교적 상징의 배경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스페인 내 전환 지역의 가능성과 평화 아래, 수많은 피의 역사가 드리워 있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동시에 몬드라곤과 같이 스페인 내전 당시에 피폐해진 지역을 살려갈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꾸려나갔던 맥락을 살필 수 있다. 역사의 굴곡 속에서 닥치는 위기를 하나의 전환 기회이자 동력으로 삼아 나아간 점은 계속 생각해 볼 지점이겠다.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다시 돌아와,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감사했던 것은 이 오래된 것들이다. 만약 이 길을 새롭고 더 좋게 정비하겠다고 4차선으로 말끔한 아스팔트로 포장도로를 만들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을까. 어느 날 아버지가 전화해서 뭐 하러 거기까지 가냐고 우리 시골길도 예쁘다고 말했다. 농담 삼아 한국 가서 순례길 만들고 알베르게(순례자 호스텔) 하나 열어서 먹고 살자 이야기 나누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4대강 공사를 따라 만든 자전거길을 따라 국토종주를 한 적이 있다. 한강 두물머리, 금강 하굿둑과 섬진강 구례 곡성 인근의 시골길, 낙동강의 푸르른 길들이 참 좋았었다. 물론 4대강을 휘저은 수많은 댐과 보, 썩어가는 물과 녹조라떼도 함께 보았다. 많이 잊혀졌겠지만 우리에게도 여러 길들이 남아있다. 


한국 사회는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는’ 사회다.[3] 새것을 쫓고 오래된 것을 경시하는 한국 사회의 관성은 정말 우리의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몇 년간 지역의 정책을 연구하면서 지역을 살리려면 일단 땅을 파든 뭐를 짓든 해야한다는 관성이 너무 강해 기후고 사람이고 내쳐지는 걸 자주 봤다. 현재의 정치인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시골길에 시멘트를 붓고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는 풍경, 산단을 짓고 대기업을 유치해 지역의 GRDP(지역내총생산)를 늘리는 장면만 본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가난한 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 ‘선진국’이 된 자극적인 서사까지. 이런 발상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든 지역이 선거 때마다 인구 확장과 수십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내걸고, 한 기가 지나 평가하면 절반도 못 실현하고 쓸모없는 문서만 남는다. 지역의 인구 전망치를 모두 합하면 이 나라의 인구는 조만간 1억 명이 넘는다. 교훈을 얻지 못한 차기 정부도 엇비슷한 목표와 정책을 내건다. 대범하게도 내지르고는 부끄러운지 제대로 공시도 되어 있지 않은 그 정책들은 들여다보지 않아도 실패할 것이 뻔하다. 매일 잔치를 벌일 수는 없다.


잔치는 이미 끝났고 이제 무엇을 먹고살지 고민해야 한다. 다시 오고 싶은 길, 보고 싶은 풍경을 만들어가는 것 외에 우리가 바랄 것이 있을까. 순례길을 마친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건 성당 종소리와 시골길 쇠똥 냄새라 한다. 어쩌면 전환이라는 게 참 별거 아니겠다.



세 번째 시기


그래서 한 달 동안 매일같이 걷고 난 후 지금 마음은 어떤가. 하루하루 걸어가며 쌓았던 것들이 하루하루 비워져 마음이 공허한 것 같기도 하다. 순례길을 다 걷고 나서 내가 왜 이 여정을 다녀왔는지 계속 생각했지만 말끔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발에 배긴 굳은살이 다 사라지고 가방을 푼 지금도 그렇다. 길을 걷기 전에 들었던 말이 길을 걷는 내 자주 맴돌아 여기에도 남긴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세 개의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가 육체적 시기, 두 번째가 감정적 시기, 그리고 세 번째가 영적 시기이다. 그런데 세 번째는 까미노가 끝난 다음에 올 수도 있다”[4]


덧. 읽는 이들에게는 한국철학을 찾던 이 여정이 왜 갑자기 순례기이자 탐사기가 되었는지 갸우뚱 할 수 있겠다. 실은 내가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문헌을 정리하고 활동을 이어가는 방식이 적절치 않다는 의문이 마음속에 일어났다. 새로운 논문을 쓰거나 유물 복원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는 과정 같달까. 이 시도들은, 정신없이 살다가 오래되어 잊어버린 귀한 것들을 떠올리는 일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길을 걷는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다. 좋은 길을 걸으면 더할 나위 없고.


까미노에서의
정성과 평화를 담아 드림


[1] 한신대학교 사회혁신경영대학원 도시혁신탐구팀, 2020, 빌바오 몬드라곤 바르셀로나 도시, 혁신을 말하다, 여는길. 참고

[2]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2016, 박정훈 옮김, 정태인 감수, 호세 마리아 신부의 생각 -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바이블,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참고

[3] 황정은, 2010, 백의 그림자, 민음사. 에서 간추려 옴

[4] 오은영(Obani), 2027, ‘나의 산티아고기’ 브런치 연재. 에서 발췌 


*이 글은 2023년 11월 28일 다른백년의 [한국철학은 녹색]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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