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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Dec 18. 2023

[한국철학과 녹색] 내가 살았던 곳

2023.12.6 인도 방랑기

델리

십몇 년 만에 인도에 왔다. 델리 공항 밖을 나서자마자 몇 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스모그가 눈앞을 가렸다. 학교는 몇 주째 휴교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세계 인구 1위, 이곳에 억 단위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해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인도의 수도에는 번쩍이는 빌딩과 명품 거리 같은 것들이 생겼지만. 인구의 대부분은 주거불능 지구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우버에 밀려 사라지게 생긴 릭샤 기사들은 앞다투어 바가지를 씌워 간간히 살아가고, 몰락해 가는 구도심의 버려진 호텔촌은 사진과 주소를 속여서 지탱한다. 어느 거리든 부랑자가 넘쳐난다. 적선을 요하는 수많은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스모그 속을 헤쳐가고 있나니, 여기가 지옥이지 싶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흥 경제국의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일까. 서울의 70, 80년대도 이런 꼴이었다고 들었다. 88년 올림픽을 준비한다랍시고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일대의 달동네 판자촌을 밀어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인천부터 부천과 구로공단의 공장들이 내뿜는 매연과 폐수로 도시가 못 살 지경이었다고도 들었다. 오랜만에 찾은 인도는 충격적이었다. 기후가 더 악화되고 지구의 회복 지점을 넘어선 미래는 이런 모습일까. 멸종이라는 단어가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은 비참한 사회와 환경 안에서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할퀴어가며 공멸해 갈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다람살라  

델리를 탈출해서 간 곳은 티베트 망명 정부와 달라이 라마가 있는 다람살라의 맥그로드 간지다. 서울에 살 때 쉬는 날이면 티베트 난민 자립 지원 단체인 록빠가 운영하는 사직동 그 가게에서 카레를 먹으며 이곳에 와보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다람살라의 첫인상은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사원까지 직행하는 케이블카가 산을 가르고 설치되어 있는 가운데, KFC와 베스킨라빈스가 보인다. 이토록 작은 티베트의 망명 정부도 힙한 관광지가 되어서 각종 역설을 겪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있는 궁과 절은 참 소박했다. 처음에 못 알아봤을 정도로 작고 조촐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아이를 안은 여자들이 관광객으로 보이는 백인과 동아시아인의 옷깃을 잡았다. 한편의 절간에서는 “옴 바니 반메 홈”이 울려펴지고 있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노 머니, 플리즈 푸드 앤 매디슨이 만트라처럼 울려퍼진다.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자본과 빈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말해지는 평화들은 무엇일까. 얼마 전 들렸던 바티칸과 참 참 대비되었다.[1] 달라이 라마는 각종 매체에 불려 다니며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만, 집 앞에 있는 가난한 자를 어찌할 수 없는 그의 마음은 무엇일까. 


애초에 인도로 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쟁이 시작되며 중동길이 막혔고, 결국 돌고 돌아서 동유럽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했는데 이곳도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외교부에서는 여행금지 지역이라고 당장 떠나라고 문자를 보냈다. 인도행 비행기의 입국 카드에는 파키스탄을 방문한 적이 있거나 부모 중 파키스탄인이 있다면 필히 기재하라고 적혀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전운이 감돈다. 전쟁이 실제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시대에 평화라는 말은 쉽게 어설퍼지고 우스워지는 것 같다. 이 어려운 난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손익의 논리에 미친 전쟁론자들과 자기-집단의 안위에만 갇힌 이들의 무분별한 무서운 말들 앞에 아차 싶기만 하다.


다람살라에는 세계 각지의 평화운동가와 예술인이 모여든다. 들어오는 길 기타를 멘 한 히피 사나이와 택시를 함께 탔었다. 이것저것 주고받다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 뒤로 더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징집령을 거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얼마 전 병무청에서도 내게 지정된 날 이내에 귀국하지 않을 시 수감되고, 만약 전쟁이 발발할 시 귀국하지 않을 경우 국적을 잃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에 아직 종전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한편, 어느 때보다 높은 한반도의 긴장이 두렵기도 했다. 모든 전쟁과 폭력은 한 세대만으로 끝나지 않고 대대손손 상처와 원한을 물려준다. 나는 더 그 굴레에 매여 들어가고 싶지 않다. 이 오래된 비극의 고리를 단절할 방안이 있을까.



실롱에서


다시 찾은 도시는 내가 어릴 때 잠시 살던 메갈라야주의 실롱이라는 도시다. 인도의 동북 지역으로 위로는 부탄, 우측으로는 미얀마, 아래로는 방글라데시가 있는 천혜의 자연 속 고산지대다. 어느날 생태심리학 수업을 듣는 가운데 자기 마음에 남는 고향의(생태의) 풍경을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고향 같은 곳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서울 집값 비싸니까 김포, 일산, 파주 신도시를 전셋값 오르는 2년마다 이사 다니며 산 유년 시절은 어디에 뿌리내릴 새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실롱은 계속 그리움이 있었다. 15년 전 잠깐 살았던 이 지역이 그간 내 생에서 왜 그리도 자주 맴돌았을까. 그 궁금함과 그리움을 가지고 1975년에 만들어진 낡은 프로펠러 비행기에 올라 히말라야 산맥 옆을 지나갔다. 


나는 이곳에서 가난해도(빈곤과는 다른)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배웠던 것 같다. 인도의 초등학교에는 대부분 고만고만한 집에서 비슷한 옷을 입고 너나 할 것 없이 어울려 놀았었다.[2] 하지만 다시 찾은 이곳은 아직 가난하지만, 건물의 층이 두 배 세 배 올라갔다. 내가 살았던 집은 5층 건물로 재건축되었고, 내가 다녔던 학교는 팔리고 쇼핑몰이 되었다. 사라진 학교에 함께 다녔던 한 친구가 구글 지도의 후기 란에 편지를 남겼다. “중요한 학교였고, 대단한 학생들이었어요. 닫혀있는 것을 보니 부끄럽습니다. 무능한 교장이 개발을 위해 학교를 팔았어요. 이곳에서 대단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교복이 참 예뻤어요.”


결국 개발의 마수를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없는 것일까. 실롱은 천혜의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차들이 늘어나는 정도를 보니 조만간 델리처럼 될지도 모르겠다 싶다. 인구는 늘어나고 사람들은 조금 더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높아지고 조금 더 현대적인 건물에서 높아진 월세를 조금 높아진 임금으로 메꾸며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도는 이제 한국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교육 시장의 문제와 자살 문제가 심각함을 보이고 있다 들었다. 사람과 환경 모두 갈아서 개발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한국의 성장 방식이 정말 남반구의 국가들 모두에게 적용되어야만 하는 걸까. 그럴 수밖에 없을까. 바람과 물을 갈아 넣어 오염된 환경이 사람들을 죽이고, 그 지난한 과정을 몇십 년 반복하면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세계가 이르게 될 것인데, 우리에게 다른 길이 없을까?[3]


글로벌 사우스, 남반구와 아시아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해 말하다가도, 막상 비참한 모습의 이 사회들을 만날 때면 어쩌지 싶다. 이 옆에서는 우라늄 광산이 채굴된다지. 90살 먹은 할머니가 막고 있다지. 이 인근 반경 지역은 광산, 댐, 제철소, 화학공장 등으로 몸살을 잔뜩 앓고 있는 공간들이다. 처음 기후운동을 시작할 때 인근의 고라마다 섬이 침식되고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져가는 사진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떠나기 며칠 전, 수소문 끝에 기적과 같이 인도 안띠(우리말로 이모)와 연락이 닿았다. 안띠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며 함박웃음으로 환대해 주셨다. 안띠가 함께 살고 있는 지역의 청소년들과 떠나기 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가지다가 왔다. 학교도 집도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아있었다.


내가 바라는 상이 한치의 오염도 없는 깨끗한 강산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낙원은 상상계에도 없다. 내가 그릴 수 있는 것은 이생에서 맺었던 연들이 보다 잘 얼기설기 엮이어 계속 이어지는 것. 이걸 녹색이라고 생태적 지속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떠나는 날 11월의 벚꽃 축제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 아래 썩어가는 강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다시 내 고향 같은 이곳에 오면 오염된 강을 함께 살려내며 놀 수 있을까.



[1] 다 돌아보는 데만 하루가 넘게 걸리는 바티칸의 대성전과 전 세계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채워진 박물관, 그 박물관의 입구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고대 파라오의 관과 미라들이 채워진 방이 있다. 그렇게 이어진 수탈의 전시는 기념품 가게에서 마친다. 교황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얼굴이 담긴 펜던트가 불티나게 팔리는 기념품 가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 앞에서 각종 주전부리를 파는 이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흑인들이었다.


[2] 물론 이것은 고산 지대에 위치해 대도시가 드물고 선주민 문화가 남아있는 근방 지역의 상대적 특징인 듯하다. 현재 인도는 지금까지도 카스트 제도가 심하게 잔존하는 지역도 적지 않고, 근대 이후의 식민지배 시대에 기원을 둔 자본주의적 불평등에 시름하고 있다.

[3] 지역을 잘 순환시켜서 살려가는 접합의 공간을 만들어가야지 싶다. 이스탄불에서 놀랐던 게 기억이 난다. 고양이가 너무 사랑스럽다. 대부분이 개냥이로, 그냥 와서 부비고  드러눕는다. 타고난 DNA가 아니라 이 도시의 아무도 그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지역의 시장이 풍성하고 활기가 넘친다. 채소는 저럼하고 신선하고 풍요롭다. 튀르키예가 미국과 유럽 양국 사이에서 정치적 경제적 제재를 당하며 국가 파산 위기 등에 처했다는 뉴스는 많이 보았고, 실제로 화폐 문제는 크게 남아있지만, 이 도시 안에서는 분명히 지켜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 안의 생명들이 안전함과 평화로움을 느낄 것, (쿠바의 경우처럼) 국경이 닫히더라도 먹고사는 가장 기초적인 식품과 주거 시장이 안정화될 것.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은 무역 국경이 가로막히게 될 때 식량 위기부터 각종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교할 때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 글은 2023년 12월 6일 다른백년의 [한국철학은 녹색]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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