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1일의 타임라인
뮤직 페스티벌을 처음 가 봤으니 뮤직 페스티벌 리뷰를 쓰는 것도 당연히 처음이다.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안고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랍스터를 생각해봐(Consider the lobster)>를 어쭙잖게 따라 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 글이 탁월한 문장력으로 현대 문명을 집요하게 성찰한 에세이가 되기는 어렵겠지만(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마치 어린아이가 개구리를 해부하듯, 2019년 6월 2일의 하루를 집요하게 파고들다 보면, 이 글의 말미에는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다소 기이한 형태의 유흥에 대한 일말의 통찰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서.
뮤직 페스티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코 라인업이다. 주관을 치사량으로 주입하고 감히 평가해보건대, 레인보우 페스티벌의 라인업은 훌륭하다. 그러나 레인보우 페스티벌의 라인업이 훌륭하다는 말은, 그 가수들을 초청하는데 굉장히 큰 비용을 지불했다는 말이고, 이 말은 또한 (레인보우 페스티벌의 주최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엄청난 비용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을 만큼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방송 탄 지 한 달도 안 된 맛집이나 눈치 싸움에 실패한 부모님들이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줄을 서 있는 어린이날의 에버랜드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많은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색색깔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부지가 필요하다는 말이고, 그러려면 지붕을 뚫고 천상계로 날아가 버린 집값 때문에 이미 빽빽이 건물로 들어찬 서울 도심에서는 페스티벌을 진행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레인보우 페스티벌 주최사는 청량리에서도 1시간 반이 걸리는 자라섬에서 (당신은 살면서 가평을, 그것도 자라섬을 몇 번이나 가 봤는가? 평소 교통량을 생각하;면 가평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넓지 않고, 따라서 그날 자라섬까지 가는 길이 숨 막히듯 막힐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략 평소보다 2배 정도 걸린다는 의미다) 페스티벌을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이미 이런 종류의 인파에는 도가 틀 대로 튼 탓인지 입장 줄은 길게 느껴지지 않지만, 서울 시내에서 이동한 것까지 고려하면 거의 4시간이 걸린 대장정 끝에 마주친 사람들이 반갑지는 않다. 그래도 잘 도착했다. 이제 즐겨보자! 즐거운 마음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우리를 입구에서 반기는 건 당연하게도, 광고다. 폭스바겐, 한율, 한화 자동차 보험 프로모션 부스가 마치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준비된 이벤트처럼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줄을 기다리느라 전체 이용 시간의 5%는 족히 잡아먹는 포토 스폿은 말할 것도 없다. 메인 스테이지에서 공연은 진행되고 있는데 뭔가 좀 당황스럽다. 공연을 보려는 사람들은 어색하게 무대 근처에서 살랑살랑 몸을 흔들고 있는데 (이용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른 사람들은 푸드트럭을 앱으로 예약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거나, 무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밥을 먹거나, 아니면 따사로운 햇볕 아래 늘어져 있다.
무대 위 가수가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쯤, 나도 돗자리를 펴고 앉아 도시락을 까먹는다. 실은 샘 김을 보러 무대 근처로 갔는데 스피커의 쿵쿵거림이 텅 빈 위장의 꼬르륵거림과 공명하는 바람에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큰맘 먹고 소고기 등심과 손질된 국내산 생새우로 조리했건만, '고소한 올리브유'가 '덕지덕지 기름'이 되자 입맛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앱으로 새 음식을 주문하기는 아까우니 꾸역꾸역 집어넣는다. 먹다 보니 맛있는 것도 같다. 장시간 운전에 여전히 남자 친구는 지쳐 있고, 나 또한 장시간 동행(?)에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지만, 돗자리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다음 가수는 ADOY거든!
사실 ADOY를 썩 잘 아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음악 애플리케이션이 추천해 준 플레이 리스트를 듣다 알게 된 가수로, 한국인 혼성 밴드라는 사실도 이번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알게 됐다. 리허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운 옷차림은 둘째 치고, 세션 소리에 목소리가 다 묻혀서 노래라기보단 웅얼거림에 가깝다. 이런 페스티벌은 처음인 건지 약간 긴장한 모습은 덤이다. 개인적으로 콘서트의 묘미는 일방적으로 수용자와 전달자의 관계에 놓여 있던 가수와 팬이 드디어 한 자리에서 양방향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팀이 넘는 가수가 30분씩 노래를 부르다 가는 페스티벌에서 그런 식의 소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리쬐는 햇볕 탓이라고 애써 위로해보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Give me a feeling'을 외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인 건 좀 쓸쓸하다.
학교폭력 논란과 아버지 소송 논란, 대리명의 논란까지. 연이어 터지는 논란에도 레인보우 페스티벌은 꿋꿋하게 잔나비를 초청했다.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에 겨웠던 지난날의 나는 어디로 가고 착잡한 심정으로 무대 멀리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타 선율을 타고 흘러나오는 오아시스와 이문세를 보고 있자니, 결국 '좋다.'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무기력하게 태양에 수분을 빼앗기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둔하다. 그리고 잔나비의 커리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사형 선고는 처절하다. 그렇다고 그 처절함에 손을 흔들어주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4 non Blondes의 <What's up>이 공허하게 메아리칠 뿐이다.
And I scream at the top of my lungs What's going on?
그런 다음 아주 크게 소리를 질러,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And I say, hey hey hey hey
난 말하지 헤이 헤이 헤이 헤이
I said hey, what's going on?
말하지 헤이, 무슨 일이야?
정준일의 공연 막바지부터 메인 스테이지를 벗어나 더 포레스트에서 백예린을 기다렸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우수수 빠져나갈 거란 기대와는 달리 자리는 요지부동이었다. 모 페스티벌에서 부른, (음원조차 나오지 않은) <Square> 라이브 영상 조회 수가 300만이 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아이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예 뒤로 빠져서 관람하면 그래도 사람 형체는 알아볼 수 있지만 어중간하게 앞줄로 가면 아예 시야가 막혀버린다. 특히나 메인 스테이지보다 더 포레스트 무대가 훨씬 낮기 때문에 앞에 키 큰 사람이라도 서버리면 무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시야 때문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두더지처럼 튀어나오는 거대한 휴대폰과 백예린을 향한 마음을 담뿍 담은 슬로건을 보고 있자니 치솟는 짜증을 누를 길이 없다. 이제 내 앞에는 백예린 대신 땀 냄새가 축축하게 밴 머리칼만이 흩날린다.
드문드문 비치는 그녀의 실루엣이라도 보고자 열심히 까치발을 드니 어느새 3곡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오로지 백예린만을 기대하며 왔는데 덥고 지친 상황에서 백예린은 보이지도 않으니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지니 백예린 노래에 집중할 수 없고, 노래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자꾸만 지쳐간다. 결국 백예린을 카메라에 담거나 그녀의 공연을 가까이서 보겠다는 헛된 꿈은 결국 마지막 곡을 앞두고서야 포기했다. 백예린이 없는 백예린 공연이라니. 자꾸만 아쉬운 마음에 무대 주변을 떠나기 어렵다. 그 많던 인원은 순식간에 떠나고 남은 공연장은 나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한적하다. 휑한 공연장을 바라 볼 다음 가수가 자꾸 마음에 걸리지만, 밤이 깊어버렸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다.
너무 안좋은 소리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지만, 실은 가위로 끊어 놓은 팔찌 형태의 입장권을 보며 생각한다. 내년에 또 갈 거라고. 으레 모든 첫 경험이 그렇듯 아쉬운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2019년 6월 1일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향기로운 산들바람이 될 것이다. 올해의 아쉬움을 반면교사 삼아 다음 페스티벌은 더욱더 향기롭게 빛나길.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2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