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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프 위의 포뇨 Jun 21. 2019

닥치고 <스쿨 오브 락>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Rock의 한글 표기는 본래 '록'이지만 편의상 이 글에선 락으로 표기함을 밝힙니다.


 3개월 동안 31편의 글을 쓰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어휘력 부족이라는 질긴 족쇄는 또다시 나를 자괴감의 틀 안에 가둬 버렸다. 장장 2시간 40분(인터미션 20분 포함)이라는 대장정의 끝에 남은 말이 고작 '미쳤다' 뿐이라니. 그런데 달리 어찌할 도리는 없다. 이 뮤지컬은 정말 미쳤고, 미쳤고, 미쳤으니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락(Rock)의 신은 이런 과격한 언행도 다 받아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 상스러운 말 좀 쓴다고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은 2013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던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명문 사립학교 아이들이 락을 배우게 되면서 겪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10살 때부터 락스타를 꿈꿨던 듀이 핀은 무대 위 돌발 행동으로 자신이 만든 밴드에서 쫓겨나고, 월세가 밀려 친구 집에서도 쫓겨 날 위기에 처한다. 밥 먹듯 반복되는 지각으로 그나마 있던 아르바이트 자리도 잃을 위기에 처한 듀이는 밀린 월세를 내기 위해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를 사칭해 명문 사립학교 '호러스 그린'의 대체 교사로 일하게 된다. 친구 이름의 철자도 제대로 모를 만큼 일자무식한 그지만 락의 향한 열정만큼은 세계 정상급! 우연히 아이들의 연주 실력을 알게 된 듀이는 아이들과 밴드를 결성해 꿈에 그리던 '배틀 오브 밴드'에 출전하기로 결심하는데.......


원작 영화, '스쿨 오브 락'


미쳤다!


 가난한 한국의 대학생이 일이십만 원을 호가하는 내한 뮤지컬을 자주 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여태까지 내가 본 뮤지컬은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토막 씬이나 아니면 DVD로 출시된 편집본이 전부였다. 물론 그 영상들 속 무대만으로도 충분히 브로드 웨이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지만,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많아 화려한 무대 연출을 체감하기엔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태까지 나는 브로드웨이의 '그림자'만 보고 살아온 셈이다. 그렇다면 직접 브로드 웨이의 이데아를 본 소감은? 당연히 '미쳤다'지!


 <스쿨 오브 락> 공연을 위해 무려 700개 이상의 조명이 사용된다. 내한 공연이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시종일관 번쩍이는 수 백개의 조명은 뮤지컬 전용 공연장을 순식간에 락 콘서트장으로 바꿔놓는다. 모든 공연을 라이브로 연주하다 보니 음향에 필요한 채널만 8000개가 넘고, 추가로 200개의 스피커, 48개의 무선 마이크가 필요하다. 5초 안에 이뤄지는 장면 전환도 예술이다. 빠른 속도로 안착하는 배경(무대 위에서 말 그대로 벽 하나가 내려온다)과 일사불란하게 소품을 움직이는 배우들까지. 한 동작도 허투루 쓰지 않고 소품 이동마저 안무로 만들어 버리는 이 공연을 '미쳤다'는 말 외에 뭐라 불러야 좋을까.


 그러나 무작정 조명과 스피커를 잔뜩 '때려 박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락의 신은 자비롭다)고 해서 좋은 뮤지컬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호러스 그린의 음악 수업 중 교장, 로잘린 멀린스는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를 부르는데, 이때 아리아의 최고 고음은 트라이앵글로 대체된다. 교장이 그만큼 높은 고음은 부를 수 없어서 대신 트라이앵글을 사용했다는 뉘앙스의 유머로, 아마 뮤지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웃음이 많이 터진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웃음은 공연이 다 끝난 후 놀라움으로 변한다. 커튼콜 이후 배우들을 한 명씩 소개할 때, 로잘린 멀린스 역 배우가 놀라운 솜씨로 밤의 여왕 아리아를 소화하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의 연출은 이렇게 똑똑하고, 디테일하다.


밤의 여왕 아리아 커튼콜


미쳤다! 미쳤다!


 2시간이 넘는 공연 시간 동안 거의 쉴 틈 없이 열창하는 듀이 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스쿨 오브 락>의 본질은 오프닝 전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짤막하게 남기는 인사 메시지에 있다.


 매번 공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제게 물어봅니다. 아이들이 무대에서 라이브로 연주하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무대를 라이브로 소화합니다. 이제 공연을 즐기세요!


 10살에서 12살 사이의 아이들이 동선을 외우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이 모든 것을 성인 뮤지컬 배우보다 훌륭히 해낸다면, 미쳤다 삼세번은 외쳐줘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커튼콜 공연만 보아도 무대를 향한 아이들의 열정과 고된 여정이 눈에 훤히 보인다. 나 10살 때는 뭐 했나 싶은 과거 회상 겸 우울한 자기반성은 덤이다. 이미 빌리 엘리어트와 애니를 통해서 브로드웨이가 선사할 수 있는 아역 배우의 실력에는 경탄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연주까지 할 수 있는 아이들까지 나타날 줄이야. 인간 능력의 진화에는 끝이 없다.


출처: 조선일보


 여기 아이들이 공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을지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첫 작품,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제외한 모든 뮤지컬 초연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올렸다. 하지만 <스쿨 오브 락>의 경우 영국의 아동 노동법이 너무 강해 제작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했고, 상대적으로 아동 노동법이 유연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먼저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아동 노동법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 한 귀퉁이에 짓눌려 있던 찝찝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을 위해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을 '아동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멋대로 재단해도 되는 걸까. 복잡한 마음이 교차한다.


 위의 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락 스피릿이 생생히 살아 있는 표정과 몸짓에서 성인 뮤지컬 배우 못지않은 여유가 느껴진다. 낯선 나라에서 이렇게 비싼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긴장되기도 할 텐데 시종일관 무대를 종횡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에선 그런 무거움을 찾아보기 어렵다. 배운 동작과 노래를 따라잡기 위해 버겁다는 느낌보다는, 정말로 체화된 동작을 자연스럽게 즐긴다는 느낌이다. 관객들의 호응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모습도 귀엽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무대를 뒤덮으면 아이들은 더 신이 나서 높은 점프를 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미쳤다! 미쳤다! 미쳤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뮤지컬의 꽃은, 바로 넘버다. 아무리 각본과 연출이 훌륭하다 해도, 좋은 노래 없이 좋은 뮤지컬은 없다. 걸어 다니는 브로드 웨이이자 살아있는 웨스트엔드,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러브 네버 다이즈' 이후 5년 만에 제작한 <스쿨 오브 락>은 2015년 초연 이후 토니 어워드 4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등, 이미 그 작품성을 입증했다. 브로드 웨이 초연 때는 100만 달러를 넘게 벌어들이며 상연 극장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경신했고,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공연 또한 상연 극장의 박스오피스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웨버의 다른 흥행 작처 럼, <스쿨 오브 락> 또한 작품성과 대증 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보기 드문 명작이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13살 때부터 뮤지컬 넘버를 작곡하기 시작해 17살 때 '요셉 어메이징'이라는 15분짜리 단편 극을 제작했으며, 엘튼 존의 작사가로도 유명한 팀 라이스와의 협업으로 20대에 세기의 걸작,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로도 캣츠, 오페라의 유령 등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 만한 작품을 여럿 제작하며 명실상부 뮤지컬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백업 싱어 자리에 지원하고자 '캣츠'의 메모리를 부르는 썸머에게 '그 노래는 싫어하니까 부르지 말라'는 듀이의 대사는 제작자가 웨버임을 이용한 귀여운 유머다.


<스쿨 오브 락>의 제작자 앤드류 로이드 웨버


 웨버의 가장 큰 장점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성에 있다. 이미 지져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락과 오페라를 결합한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고, 다음 작품이었던 에비타에서는 라틴, 탱고, 룸바, 팝 등이 모두 혼합된 음악을 작곡했다. 락과 오페라, 팝과 탱고를 넘나드는 그의 작곡 능력은 <스쿨 오브 락>에서도 그대로 발현된다.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는 대부분 유명한 락밴드 음악을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에 그대로 뮤지컬화 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뮤지컬화를 위해 새로운 곡을 작곡할 필요성을 느낀 웨버는 영화에 사용된 곡 3곡 이외에 전형적인 뮤지컬 넘버부터 신나는 락과 발라드까지 14곡을 추가로 작곡했다.


 많은 사람이 <스쿨 오브 락>의 대표곡으로 'You're in the band'를 꼽는다. 그러나 <스쿨 오브 락>을 보러 가기 전 딱 한 곡만 미리 들어 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Stick it to the man(권력에 대항하라!)'을 추천하고 싶다. 본격적으로 아역 배우의 연주 실력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쿨 오브 락>의 주제를 관통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규칙에만 익숙하던 아이들은 'Stick it to the man' 이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과 무관심한 부모님, 무한 경쟁 사회에 맞서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한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전혀 관심 없는 럭비 경기를 봐야 하는 빌리, 전학 후 친구 사귀기 어려워하는 토미카 그리고 부모님의 지나친 교육열에 지친 잭까지. 처음에는 어색하게 악보에 맞춰 연주하던 아이들은 금세 자신의 감정이 담긴 선율에 몸을 맡긴다. 대망의 배틀 오브 밴드 본선 공연 날, 아이들은 사칭이 들통나 집 안에 숨어있는 듀이에게 'Stick it to the man'을 부르며 어서 일어나라고 말한다. 듀이의 수업 아닌 수업 덕분에 경쟁 사회에 익숙하던 아이들은 꽉 막힌 부모님에게 락이 무엇인지 한 수 가르쳐준다. 그리고 현실에 지쳐 잔뜩 움츠러든 관객들에게 진정한 락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공연 전체가 말 그대로, <스쿨 오브 락>인 것이다.


Stick it to the man 커튼콜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뮤지컬 넘버를 음원으로 들었을 때의 심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구리선을 타고 흘러나오는 밋밋한 음성은 뮤지컬 전용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우퍼의 쿵쿵거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이번 여름에는 땀 냄새 자욱한 바닷가 대신, 시원한 락 콘서트장으로 피서를 떠나보는 게 어떨까. 비싼 푯값이며, 일정이며 하는 핑계들로 이 귀중한 기회를 놓치기엔, 이 작은 천재들의 앙상블이 너무 훌륭하다. 그러니 진심으로 말하건대, 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난 후 후회하지 말자. 락의 신 가호 아래 닥치고 <스쿨 오브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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