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사이에 투박하게 놓인 돌덩이들에 눈이 갔고, 해리포터보다 세계 역사 이야기 전집을 더 자주 읽었다. 흙으로 빚은 토기에 타락죽을 끓여 먹는 생활이 10살짜리의 눈에 뭐가 그리도 흥미로웠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지만 어쨌거나 역사에 대한 나의 괴랄한 취향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길고 긴 인류 문명의 역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기는 누가 뭐래도 세계 4대 문명이다. 거대한 물줄기에서 비롯된 비옥한 토지가 인류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있고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그리스 문명만이 강이 아닌 바다를 중심으로 문명을 형성했는데,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기원전 45000년, 그리스 반도에 최초의 인류가 거주한 이래 그리스 문명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여 유럽 최초의 농경사회를 이룩했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며 잉여 농산물을 사고팔던 상인들은 순식간에 지중해 해상무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에게 해에 징검다리처럼 펼쳐진 섬들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사이를 오가며 엄청난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
에게 문명이 번성하면서 에게 해에서 가장 큰 섬이었던 크레테는 강력한 해양 지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미노스의 궁전이 있는 곳이다. 크레테의 군주 미노스는 아들이 아테네의 경기에 참여하다 목숨을 잃자, 그 보복으로 9년마다 아테네에서 7명의 처녀와 청년들을 데려와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루스에게 주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세 번째 공물을 바쳐야 하는 때가 돌아오자, 희생물로 자원하여 미노타우르스를 무찌르고 미로를 탈출한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루스의 이야기는 비록 신화이지만,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실이 담겨있다. 기원전 1450년 경, 크레테 문명의 중심지였던 테라에서 거대한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이어지는 지진과 기후변화로 크레테 문명은 급속도로 막을 내렸다. 크레테 문명의 붕괴 후 그리스 본토에서 힘을 기르던 뮈케나이 문명이 지중해 해양 산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마치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를 무찌르고 아테네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위의 사진은 기원전 16세기 프레스코 벽화로, 테라 섬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파괴된 주택에서 발견되었다. 해양 문명답게 손에는 물고기를 가득 들고 있는데, 이는 크레테 문명이 상업 및 농경뿐만 아니라 수산업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래의 사진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한 장군 아가멤논의 장례용 가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뮈케나이 왕자의 장례용 가면이다. 이 가면은 뮈케나이 문명이 공고한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지표이자 영혼의 불멸을 향한 그들의 내세관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고고하면서도 비장한 표정의 황금 가면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퇴색되지 않은 우아함을 자랑한다. 비록 가면이 정말 아가멤논의 것은 아니지만, 전시회의 제목에 아가멤논이 들어가는 것으로 우리는 이 유물의 가치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13세기에 이르자, 뮈케나이 문명 또한 해양 민족의 침략으로 전설 속의 서사시로 침잠한.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 10~11세기, 그리스에 최초의 도시국가, 폴리스가 형성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테나이(Athenae)다. 초기의 아테나이는 귀족세력의 과두체제 내 충돌로 참주정을 채택했다. 아테나이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상업과 농업을 장려했고, 사회 집단 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아테나이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대에 이르러 엄청난 반발에 직면했고, 기원전 510년 결국 막을 내린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뒤를 이어 참주가 된 클레이스테네스는 또 다른 독재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아래의 사진은 도편 추방제에 사용되었던 실제 도편들로, 추방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스 보물전을 관람하기 전 인터넷에서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물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전무후무한 기회!'라는 리뷰를 봤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아마 중학교 2학년의 나는 사회 교과서 속 도편 추방제가 이리도 흥미로울 수 있으리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래의 석상은 그리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정 기념비다.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민주주의의 탄생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묘한 전율이 일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특정 인물이 아닌 시민들을 의미한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에서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닌 시민이었다. 석상 하단부에는 현재의 알파벳과 거의 유사한 글씨로 민주정을 방해하고 독재정을 구축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법안이 적혀있다. 바야흐로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탄생보다 더 놀라웠던 건, 민주주의의 탄생을 가능케 한 문자의 발명이었다. 유럽 내 대부분의 국가들이 알파벳을 사용하고 전 세계의 학교들이 영어를 가르치는 21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 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아테나이의 선동으로 도시국가 간 내전이 격화되면서 신흥 세력의 강자로 마케도니아가 등장했다. 마케도니아의 국왕 필리포스 2세는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에 평화를 요구하며 범 그리스 연합을 형성했고,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원정 전날, 필리포스 2세는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름도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잇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는 물론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인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유럽과 아시아에 새롭게 전파한 다문화 융합과 포용 정책이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 내 도시국가 간 연합을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한 모든 국가를 그리스로 지칭하며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범 헬라스(헬렌은 그리스인이 자신들을 일컫는 말로, 그리스의 전설적인 영웅 헬렌의 후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신 아래, 그는 동방의 정신과 그리스의 문화를 결합하여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의 융합을 의미하는 헬레니즘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아래의 석상은 청년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 조각상으로, 비록 수 천년 세월에 부서지고 긁혔지만 비범하고 예리한 표정만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는 서양사상 처음으로 살아 있는 동안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후에도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전시회 마지막 벽면 폼페이에서 발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 모자이크 작품을 통해 사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했던 그의 기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리뷰는 푸리오 두란도의 <고대 그리스: 서양 문명의 여명>과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사진은 모두 전시회에서 직접 촬영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