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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사람 박코리 Apr 29. 2017

당신들로 가득 찬 나의 집         

월셋집이 내 집 같은 이유, 당신의 조각들    

금요일 오전 열 시, 책상에 앉았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난 뒤라 집이 고요하다. 계란을 삶느라 올려둔 물 끓는 소리만 들린다. 빛으로 가득 한 아침의 방에서, 우두커니 있는 나를 본다.

"잘 지냈니? 오랜만이다."

늘 타인에게 건네던 인사를 내게 묻는다. 개인적으로 이번 달은 유독 일이 많았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들어간 회사를 그만뒀고, 바로 다음 날에는 이사를 했다. 사방에 놓인 박스들로 어수선했던 집이 한 달이 지나서야 그나마 정리가 됐다. 새로 마련한 서랍장에 옷가지들을 개어 넣고 나니 기분이 개운하다.



우리는 집을 사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월셋집에서 월셋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을 살까 싶어 보러 다니기도 했지만, LA 어디든 집값이 오를 대로 오른 탓에 가진 예산과 원하는 집 간에 격차가 컸다. 옆에서 어른들은 매 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신다. 마음에 안 드는 집이라도 사두면 곧 집 값이 오른다는 말도 하신다.


청개구리 같은 우리는 부모님 말씀을 듣는 대신 지금 사는 남의 집에서 내 집 살 듯 살기로 했다. 살고 싶지 않은 집을 집값이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생 갚아야 하는 큰 돈을 주고 사는 건 도박 아닐까? 인테리어 공사는 못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집을 채우다 보면 남의 집이 내 집 같아지지 않을까? 무리해서 집을 샀다가 날리거나, 못 팔아서 대출금을 갚느라 매달 고생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봐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신들의 조각으로 채웠다.  

인테리어를 어떻게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허연 벽만 보고 매일을 지내자니 맹숭맹숭 재미가 없고, 몇 년 있다 나갈 남의 집인데 다 뜯어고치자니 내키지가 않았다. 돈을 들이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서울에서 LA까지 오면서도 차마 두고 오지 못 해 이고 지고 온 것들을 훑었다.


전부 당신들의 조각이었다. 당신들이 떼어준 일부를 이 곳 LA에 내 마음 칸칸이 실어왔다. 친구가 결혼 선물로 그려준 그림, 엄마의 식물 세밀화, 사진들이 보인다. 보이차, 홍차 등 갖가지 차와 다구들도 있었다, 차 마실 때 쓰라고 동생이 깎아준 나무 도마와 함께. '이거는 누가 언제 줬지, 여기에 둘까 보다.' 등등 혼자 구시렁 대면서 당신들의 일부를 내 텅 빈 집에 채웠다.

빨간 백조는 나, 은빛으로 반짝이며 물길을 뿜어내는 거북이는 남편이다. 내 친구 키아라, 고마워!  

친구가 결혼 선물로 그려준 그림은 방 책상 앞에 뒀다가 다시 현관 입구 쪽으로 옮겼다. 빨간 신발장에 신발을 고이 넣은 후 그림 속 백조랑 거북이를 한 번씩 보고 나야 집에 온 기분이 든다.  

벽에 걸기 전 그림만 따로 한 장 남겼다. 서울을 떠나는 딸에게 황금빛 모란을 그려준 엄마, 고마워요.

엄마의 그림은 밥 먹을 때마다 보고 싶어서 식탁 자리 옆 벽에 걸었다. 차와 다구들은 아직 놓을 자리를 정하지 못해서 부엌 찬장 중 하나에 옹기종기 모아두었다.

구석구석을 나의 것들로 메웠다.

남의 집이 비로소 내 집이 되었다.



내 집에서 내 이름을 걸고 내 일을 하겠다, 당신들처럼 나도-

이사 전후로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갈 일이 많았다. 가구를 보러 다니느라 그랬다. 남편과 나, 둘 다 50년대 빈티지 가구인 Mid Century Furniture에 반해서 주말마다 가까운 Venice, Hollywood부터 두 시간 반 거리의 Riverside 등 사방의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LA에는 앤티크 가구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집 차고를 오피스 겸 쇼룸으로 쓰는 개인들이 주축을 이룬다. 가구를 발견하는 기쁨도 컸지만, 자기가 파는 물건에 애정을 담뿍 담아 파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운 여정이었다. 어떻게 가구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집에서 일하는 건 어떤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마리사가 초크칠한 네이비블루 서랍장. 위에 올려둘 금색의 사물을 찾고 있다.
집 차고에 만든 티나의 쇼룸 모습.

유명 가구 브랜드에서 MD로 일하던 티나는 집 차고에서 자기가 고른 물건들을 파는 게 즐겁다고 했다. 남의 이름 대신 내 이름을 걸고 내 집에서 내 일을 한다는 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신나는 일인가 보다. Etsy에서 마트서 사모은 조명 갓들을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티나, 옆 집 할머니가 준 서랍장 색이 마음에 안 들어 초크로 칠했던 게 계기가 돼 프렌치풍 가구를 팔게 됐다는 마리사. 둘 다 좋아하는 일을 해서인지 얼굴에서 빛이 났다.



서른살의 꿈은 자란다, 미완성의 집에서-

식탁이 오기 하루 전 날 아침. 빈 자리가 빛으로 채워졌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아직 미완성이다. 채운 자리보다 빈자리가 더 크다. 웬만한 박스는 다 터서 짐 정리를 했지만, 제자리를 찾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종이봉투에 넣어둔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꽤 된다. 생활을 하면서 사소한 물건들 하나하나 찬찬히 제자리를 찾아줘야겠다.


그레타(Greta M.Grossman)의 식탁이 드디어, 우리 집에 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나와 남편을 닮아갈 월셋집에서 서른 살의 나는 꿈을 꾼다. 올 가을을 목표로 내 작은 브랜드의 시작을 준비 중이다. 스무 살 때의 꿈이 잔뜩 부풀어올라 날아갈 듯한 풍선 같았다면, 서른의 꿈은 그보다 소소해서 한 손에 느슨히 쥐고선 매일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서른의 나는 Pasadena에 자리를 잡았는데, 마흔 즈음에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내게는 그 어디보다 편안한 곳, 내 집에서 꿈을 꾸는 오늘이 신나고, 내일이 기다려진다.



오늘도, 내일도 자유롭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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