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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대웅 Dec 27. 2020

나의 아버지 전기 01 일자무식

24살까지 이름 석자와 주소 밖에 몰랐다

80살 아버지의 전기.

나의 아버지는 13살에 홀홀 단신이 되었고, 14살에 시작한 사회생활의 첫 직업은 머슴살이였다.

의지할 곳 하나 없고, 의지할 기술조차 없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을 긍정으로 만들고, 생존의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내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다했다.

한국전쟁, 산업화, 중동특수, 민주주의의 성장 등 한국 현대사의 모든 과정속에서 

인내, 지혜, 성실, 자신만의 결단으로 어려움을 헤치고 나갔다.


이 전기의 주인공, 나의 아버지, 한일순 씨와 어머니


전기(주인공), 이름: 한일순

1941년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가리점에서 출생했다. 24살까지 이름 석자와 주소 밖에 몰랐다.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7월, 저자가 11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다음해 먹고 살기 위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본인은 고모집에 맡겨졌고, 어머니와 동생은 절로, 누나는 전주로 식모살이를 하기 위해 떠났다. 14살에 경제적인 이유로 고모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한 일은 머슴살이. 

 5년여간 머슴살이를 한 후,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월산리로 이주, 서울을 비롯해 인근 지역에서 둑방 공사, 냉차 장사, 산판일 등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 때 호적이 없는 상태에서 살인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운좋게 살아났다.  


 1963년 23살에 생계 수단으로 창호지 만들기를 시작했다. 27살에 돈이 없어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지금의 부인과 동거를 시작했다. 

 1980년 산업화가 진전되고, 대부분의 초가집이 사라지면서 창호지 수요 급감하고, 창호지 공장이 망함. 서울 봉천동 달동네로 이사, 단칸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근로자 근무, 이 때의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청계천에서 포장마차를 시작하였다. 이후 강서구 신월동으로 이주하여, 생선 장사 및 닭장사 시작. 


 특히 18년 6개월 동안 닭장사를 하였다. 1980년대 패스트푸드 음식의 붐에 힘입어 닭장사를 괜찮게 하였고, 이를 밑천으로 자신만의 가게와 살림집, 노후 자금을 마련했으며, 자식 3명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현재 장사를 접고, 경기도 가평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60살이 넘을 무렵부터 꽃심기, 나무심기를 좋아했다



전기를 시작하며 


 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이다. 아버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군대 입대를 기다리던 24살 무렵까지, 당신이 알고 있던 글자는 당신의 이름 3글자 “한”, “일”, “수” 와 당신이 살고 있던 곳의 주소에 불과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몇 번이나 이렇게 말했다. 

“일자무식이 이 정도면 잘 살았지! 안 그러냐?”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얼굴에 미소를 띠운 채 “하, 하, 하.”하며, 가볍게 웃곤 했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시름을 잊으려는 듯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자무식”으로 살았던 과거는 한때 아버지에게 괴로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자무식”은 이제 아버지가 즐겁게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바꿔 말해 아버지의 “일자무식”이란 말과 웃음에는 ‘과거에는 어려웠지만, 이제는 그것을 모두 극복했다.’는 자신감, 성취감, 여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며,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아도 여유가 있거나, 아니면 최소 대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나이든 분들이다. 아버지는 돈을 크게 벌었거나, 학자나 과학자, 정치인, 교육자 등 사회 저명인사가 아니다.

 아버지에게 내세울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에 불과 할 것이다. 아버지는 팔십 평생을 나름 성실하게 살았고, 어머니에게는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나와 여동생, 남동생에게는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해,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생존이란 삶의 힘듬 또는 삶의 당면한 문제로부터 벗어 난 이후, 바꿔 말해 나이를 먹고, 아버지 스스로 은퇴를 한 이후에는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신만의 힘으로 살 수 있을 정도가 된 노인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3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아버지는 올해 80살이다. 아버지는 평생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지.” 

아버지는 이런 꿈을 꾸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런 꿈을 꿀 손톱만큼의 여유 혹은 상상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자서전 써보는 것, 어떠세요.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면, 제가 정리할게요.”  

 내가 이렇게 제안했을 때, 아버지는 “뭘 그런 것을 쓰냐.”고 말을 했지만, 그 순간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았을까? 몇주 후 나는 사각형의 4인용 앉은뱅이책상을 가운데 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 사이 한쪽에 앉았다. 곧바로 나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펜과 노트, 녹음에 필요한 핸드폰을 놓았다. 이 순간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내심 기쁘고, 즐겁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자서전을 쓰자고 처음 말했을 때 생겨났던 호기심이 한 걸음 더 진척되었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정말로 나의 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쓰게 되는 것인가’라는 기대가 더 커졌을 것이다.    

 한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2시간 혹은 3시간이 걸렸다. 그 때 마다 아버지는 힘들어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웃는 표정과 말로 미루어 보건데, 아버지에게는 이 때가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또 인터뷰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다. 당신이 잘한 대목에서는 신나게 자랑스럽게 웃음을 섞어가며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말했고, 당신이 판단을 잘 못한 부분이 있거나, 누가 봐도 잘 못한 일, 부끄러운 일이 있으면, 애써 말을 아끼셨고, 때론 짧은 몇 마디와 웃음으로 넘기셨다. 

 나는 질문을 했고 아버지는 답을 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아버지 옆에는 어머니가 앉아 계셨다. 인터뷰를 하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2번, 아니 3번인가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3번째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는 올해 21살이 된 아버지의 맏손녀, 나의 딸이 앉아 있었다. 


<다음 번에 계속>



<나의 아버지 전기>의 차례

들어가며 

1장 집안 이야기 

2장 어린 시절

3장 14살, 첫 머슴살이

4장 품팔이

5장 죽을 뻔했던 이야기 

6장 아내와 만나다

7장 창호지 공장

8장 코딱지만한 권력자들

9장 보증과 도박

10장 산업화와 문닫은 창호지 공장

11장 서울 생활, 단칸방과 중동 근로자 

12장 신월동 장사, 결단의 연속 

13장 치킨의 시대

14장 집과 가게를 마련하다 

15장 긍정의 기억들

16장 두 아들과 딸   

17장 미켈란젤로가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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