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애들러와 깁> 리뷰
죽음에 대한 기이하고 아름답고 시니컬한 예찬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0.
몇 번을 썼다 지우는지 모르겠네.
나는 요약정리를 잘 한다. 글도 마찬가지야. 명확하고 확실하고 깔끔한 걸 좋아해. 하고 싶은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는 글, 무슨 말을 하는지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되도록이면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추고, 본론은 다시 본론1, 본론2, 본론3 등으로 나누고. 각 부분은 다른 부분들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게 좋지. 한 마디로 조리 있고 통일성 있는 글이어야 한단 말이야. 너무 장황하거나 수사적인 글은 별로. 또 초등학생 일기처럼 쓰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세 번 이상 퇴고하는 건 필수야. 마치 단상 위에 선 연설가처럼, 무대 위에 선 연주자처럼, 작가도 종이 위에 서있는 거야. 글은 작가의 작품이자 쇼이자 퍼포먼스여야 하니까, 가능한 한 완벽하고 완전하게 써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영영 이 글을 못 쓸지도 몰라.
#1.
그런 거 있죠. 내 안에 너무나 확실한 느낌이 있는데 도무지 말로 표현 못하겠는 거. 왜, ‘형언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 있잖아요. 너무나 대단하고 강렬한 느낌이라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때. 진부한 표현이기는 한데, 딱 이럴 때를 위해서 준비해 둔 말인가봐요.
그 연극의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내게 남아있었어요. 사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 느낌이 같이 떠올라요. 삶을 낯설게 만드는 느낌.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로부터 의도치 않게 유리되어버린 느낌. 죽음을 머금은 그 분위기.
연극은 힘이 셌어요. 온통 사로잡고 휘감고 옥죄이고. 생각의 어둠 속으로 나를 사정없이 던져놓았어요. 힘이 센 연극을 보고 힘이 센 생각이 나를 잠식하는 바람에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그 길이, 돌아온 집의 모습이 조금 이상해 보였어요. 그동안 야금야금 연명하던 일상이 죽음보다도 더 괴상해보였어요. 매혹적인 우울감, 자꾸만 부유하는 생각, 잠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것 같은 기분.
그런 연극입니다. ‘애들러와 깁’
#2. 시놉시스
기이한 행동과 충격적인 작품으로 20세기 말 미국 현대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자넷 애들러와 마가렛 깁. 레즈비언 커플인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은 의미 없다’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들을 파괴한 후 세상을 등진다. 몇 년 뒤, 애들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깁 또한 죽었을 거라 추정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2018년, 오래 전부터 애들러를 흠모하던 배우 '루이즈 메인'은 그녀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애들러를 ‘진짜'처럼 연기하기 위해 루이즈는 매니저 샘과 함께 폐허가 된 그들의 은둔지를 찾아간다.
그런데 버려진 폐가인 줄 알았던 그 집에서 살아있는 깁과 맞닥뜨리게 된다.
#3.
처음에는 난해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꽤나 명확한 내용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서사에 한해서는 말이다. 연극은 애들러를 완벽하게 재현하려는 배우 루이즈라는 인물과, 애들러와 자신의 삶이 상업적으로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에 반대하는 깁이라는 인물을 충돌시킨다. 두 인물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연극은 자본주의와 대중 사회가 예술과 예술가를 취급하는 방식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이것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사실 나를 매료시킨 건 조금 다른 지점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4.
루이즈와 깁의 충돌은 단지 자본과 예술의 충돌만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충돌이다.
#5.
루이즈가 대변하는 삶이란 욕망의 덩어리이다. 당사자가 반대하는 영화 촬영을 강행하게 만든 건 돈을 향한 욕망이었고, 망자와 그의 애인을 모욕하면서까지 루이즈가 연기를 하게 한 건 자신의 우상에 대한 욕망이었으며, 무단가택침입에 시체 훼손을 비롯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만든 건 의미를 향한 욕망이었다.
의미를 향한 욕망. 천재적인 예술가에게는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스캔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그런 사람의 죽음은 분명히 자살이거나 애인에 의한 살인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 불쌍한 그의 해골은 죽음 후에도 편안한 휴식을 갖지 못하고, 어리석은 산 자들에 의해 동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것.
#6.
의미.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사실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믿곤 하지. 그런 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부여하잖아. 의미는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때로는 거품처럼 우리의 정신을 가리기도 한다. 무지개 같은 것이지. 있는 것 같고 아주 예쁘기까지 하지만 사실 없는 것이란 말이야. 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거라고. 무지개를 찾아 떠나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의미를 찾아 헤매고는 하지.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건 오직 하얀 해골. 그것은 그저 해골일 뿐이었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어.
#7. 대사 中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와도 같지…”
#8.
반면 깁은 죽음을 대변한다. 스스로도 ‘나는 이미 죽었어’라고 말한다. 애인의 죽음에 따라죽지 못한 비탄, 자책 등이 담긴 말이겠지만 실제로도 그의 정신은 이미 죽었다. 그 때문에 깁은 진실을 대변한다. 거짓과 헛소문과 가십투성이인 이 삶의 세계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진실, 순수한 죽음의 세계.
모두의 예상과 달리 애들러는 치매로 죽어갔던 것이다. 살인도, 자살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모든 자극적인 이야기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인위적인 삶에서 도망쳐 나온 천재적인 예술가의 말년은 자연스러운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었고, 깁은 그런 애인의 자연과도 같은 죽음을 조용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9. 대사 中
“우린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
#10.
그런데 삶이 죽음을 모욕했다. 산 자들의 욕망이 죽은 자들을 다시 한 번 죽였다. 그들 예술가들은 죽기 전 스스로 자신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지우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었다. 그 죽음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산 자들은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추모라는 명분 아래 그 흔적들을 무참히 파헤쳐 폭력적으로 햇빛 아래에 널어놓았다. 무덤을 파고 해골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가 부활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
#11.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했지. 죽을 때,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릴 때.
너희는 영원토록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겠지만
그들은 그런 식의 불멸보다는 차라리 망각되어 죽어가는 것을 원했을지도 몰라.
#12. 대사 中
“죽은 자는 말이 없어야 하죠.”
#13.
결국 깁도 죽였니?
#14.
기이한 연극이었다. 흡사 잔혹 동화같은 내용도 그렇지만 극의 형식도 더없이 특이했다. 두 개의 서사를 병치시켜 놓는가 하면, 말 없는 아이를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시키기도 하고, 초반에는 로봇처럼 연기하던 배우들이 갈수록 사실감을 얻게끔 하는 독특한 설정도 있었다. 각 장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극적인 효과를 내는지를 자질구레하게 나열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건 연극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니까.
동시에 아름다운 연극이었다. 일차적으로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다. 극은 논문 발표의 형식을 빌려 계속해서 애들러와 깁의 예술 활동을 읊어주는데, 발표를 들으며 상상하다 보면 그들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들의 예술에 매료되게 된다. 또 애들러와 깁을 파멸시키는 배우 루이즈 역시 기본적으로는 예술가라고 볼 수 있으니, 이 연극은 결국 예술에 대한 연극인 셈이다.
그러나 예술보다 더욱 아름다운 건 죽음이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두렵고 아프고, 때로 기괴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은 어딘가 매혹적인 부분도 있다. 보기 싫지만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네 목숨이 금기시한 것에 대한 반항적 호기심이랄까. 더군다나 이 연극이 그리는 죽음은 순수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거짓투성이에 욕망 덩어리인 삶으로부터 조용히 저항하는 순수한 죽음이다.
조금은 시니컬한 극이기도 하다. 이 극이 루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연극은 관객이 루이즈에게 몰입하거나 그를 마구 비난하는 것 모두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루이즈가 부정적이고 비정상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관객이 그를 매도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고 반성하라는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삶이라는 게 돈이 없으면, 욕망이 없으면, 의미가 없으면 굴러가지를 않으니까. 무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욕망하고 또한 동경하고, 끝내 그것을 이뤄내고야 마는 루이즈의 기괴한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니까.
#15. 극단 소개 中
우리들은 ‘극장’이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극장은 총체적 삶이 다시 일어나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16.
성공하셨어요. 적어도 제게는 말이죠. 총체적 삶이 다시 일어나는 시공간, 멋진 말이자 정확한 말이네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연극이 그래요. 솔직히 난해한 연극이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아우라만은 확실하게 제 안에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언제라도 이 연극을 떠올릴 때면 그 작은 무대에서 풍기던 낯선 우울감에 젖어들 것 같아요. 삶과 나를 괴리시키는 그 감각 말예요. 그 매혹적인 감각에 빠져들어 너무 다른 길로 가지만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좋은 연극,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