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집 케이크 도감
해를 거듭하면서 어째 크리스마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어렸을 땐 전날 다 같이 여행을 가거나 최소한 근사한 저녁을 먹고, 베개 위에 양말도 걸어 놓고 편지도 쓰고 그런 두근거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그냥 휴일+1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됐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종교가 없고, 특히 서구 문명에 조금 시니컬한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남의 나라 신의 생일을 왜 챙기냐는 식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에 나로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게 조금 민망스러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늘 빼먹지 않고 챙기는 것 하나, 바로 크리스마스 케이크다. 물론 이건 디저트 덕후인 나의 고집이 작용한 면이 크지만, 어쨌든 케이크 하나조차 없으면 어딘가 허전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종류에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나는 그런 케이크는 꼭 하나 사서 나눠먹는다. 크리스마스가 귀찮은 마음과 바깥에서 울리는 경쾌한 캐럴 소리 간의 인지부조화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랄까.
그래서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고른다. 그런데 고르려다 보니 종류가 수십 가지다. 과일 케이크, 초코 케이크, 롤 케이크, 파운드, 타르트, 심지어 통나무 케이크까지! 그래서 정리해봤다. 빵집 쇼케이스 앞에서 결정 장애에 걸리는 사람들을 위해, 무슨 케이크가 있는지 몰라 맨날 과일 생크림 케이크만 고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보다 마음에 드는 케이크를 고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맘대로 선보이는 케이크 도감이다.
보통 ‘케이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엄밀히 말해 스펀지케이크는 케이크의 빵 부분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오븐에서 구운 스펀지케이크를 가로로 잘라 크림을 바르고 과일이나 초콜릿 등의 장식을 얹으면 가게에서 보는 바로 그 케이크가 된다. 재료와 장식에 따라 생크림 케이크, 버터크림 케이크, 과일 케이크, 초콜릿 케이크 등 수백 가지 종류를 만들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해서 아마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매출 1위를 차지하는 케이크가 아닐까 싶다.
중앙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시폰 케이크는 사실 스펀지케이크의 일종인데, 다만 반죽에 머랭(달걀흰자를 거품 낸 것)을 섞어 일반 케이크보다 촉촉하고 가볍고 쫀쫀한 식감을 내는 게 특징이다. 비단 같이 우아한 맛을 낸다고 해서 ‘시폰(chiffo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식감이 특이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층층이 크림을 바르는 스펀지케이크와는 달리 보통 시폰 케이크는 겉면에만 크림을 바른다. 홍차나 녹차 시폰이 대표적이다.
무스(Mousse)란 계란과 크림으로 만드는 프랑스의 디저트이다. 생크림보다는 텁텁하고 푸딩보다는 부드럽게 녹는데, 아주 진득해진 커스터드 크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무스를 사용한 케이크가 바로 무스 케이크인데, 빵과 달리 형태가 변형되기 쉬워 보통 냉동실에서 굳히거나 투명 띠를 둘러 고정시킨다. 주로 초콜릿이나 상큼한 베리류의 과일이 재료로 사용된다.
전형적인 케이크 모양은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유난히 많이 보여 도감에 넣었다. 밀가루, 계란, 설탕, 버터가 각각 1파운드씩 들어간다고 해서 파운드케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재료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일반 케이크와 크게 다르진 않다. 재료를 섞고, 기호에 따라 견과류나 말린 과일을 섞어 파운드 틀에 넣고 구우면 위와 같은 모양이 나온다. 요즘 같은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예쁘게 꾸민 파운드케이크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크림이 없고 부피가 작아 보관이 쉬우므로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파운드케이크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본격 크리스마스 디저트. 종 또는 왕관 모양에 사선 무늬를 가진 구겔호프는 그 예쁜 모양 덕분인지 크리스마스 때 일반 케이크만큼이나 많이 팔리는 품목이다. 케이크 반죽을 구겔호프 전용 틀에 넣어 굽는데, 역시 기호에 따라 견과류나 건과일을 넣으며 구워낸 후 위에 설탕 글레이즈를 부어 장식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크리스마스 케이크인 팡도르와 모양이 매우 비슷하며, 연말마다 화려한 장식을 달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 디저트이다.
이름부터 크리스마스 케이크다. 뷔슈(Bûche)는 프랑스어로 통나무를 뜻하는데, 따라서 뷔슈 드 노엘은 ‘크리스마스의 통나무’라는 이름이 되겠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장작불을 연상시키는 통나무 모양의 케이크인데, 사실은 우리에게 익숙한 롤 케이크의 겉면에 초콜릿을 발라 나뭇결의 느낌을 낸 것이다. 프랑스의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며,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이니 특색 있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또 다른 나무 케이크다. 독일어로 나무를 뜻하는 바움(baum)과 케이크를 뜻하는 쿠헨(kuchen)의 합성어인데,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바움쿠헨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케이크이다. 가로로 잘라 놓은 나무처럼 생겼으며, 특히 단면이 나이테 무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역시 최근 들어 고급 디저트 가게는 물론 저렴한 프렌차이즈 베이커리에서도 흔히 보이게 되었다. 평소에도 간식으로 먹기 좋지만,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초콜릿이나 설탕 글레이즈 옷을 입고 더 화려하고 맛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바움쿠헨이다.
하지만 이런 예쁜 크리스마스들이 이미 예약이 꽉 차 있거나 다 팔렸다면, 차선책으로 선택해 볼 만한 케이크가 몇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로는 요즘 인기 많은 크레페 케이크. 모 케이크 전문점에 의해 널리 알려진 크레페 케이크는, 얇은 밀가루 반죽인 크레페를 여러 층 쌓아 올려 만드는 케이크이다. 잘못 만들면 밀가루 맛만 나는 떡이 되지만, 잘 만들면 부드러운 바닐라 풍미가 나는 고급 디저트가 된다. 크레페 케이크로 이번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면 조금 비싼 돈을 주더라도 잘 하는 집에서 고르기를 추천한다.
타르트 역시 상당히 괜찮은 선택. 사실 스펀지케이크만큼 보편적인 디저트 중 하나이다. 하지만 대체로 타르트가 일반 케이크보다 화려해서 연말 분위기 내는 데에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바삭한 타르트지에 크림 등의 필링을 채우고, 그 위에 딸기나 블루베리 등 형형색색의 과일을 올려 만든다. 과일 타르트가 일반적이지만 초코 타르트나 에그 타르트와 같이 다른 종류도 다양하게 있다. 크리스마스를 닮은 빠알간 딸기가 올라간 타르트만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내주는 디저트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이는 타르트와 상당히 닮은 디저트인데, 다만 필링(타르트나 파이의 속 내용물)을 올리기만 하는 타르트와 달리 파이는 필링을 채우고 위에 또 반죽을 덮어 굽는 방식으로 만든다. 대표적으로는 애플파이가 있으며 피칸 파이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좋고, 한편 식사용으로는 고기를 넣어 굽는 미트파이가 있다. 요즘 한국에도 파이·타르트 전문점이 늘어나고 있으니 넓적한 파이 하나 사서 다 같이 나눠 먹으며 따뜻한 연말 보내보길 바란다.
그림 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