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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누누 Sep 20. 2020

아빠와 둘이 떠난 여행

어색하지만 두근대는



재작년쯤 아버지와 삿포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버지가 외국행 비행기를 탄 건 (제가 아는 한) 사우디 건설 현장에 파견된 이후로 처음이라 하셨습니다. 사진 속에서 사막 한가운데 있던 아버지는 20대 초반이었으니, 거의 40년 만에 비행기를 타신 겁니다. 그래서인지 좀처럼 웃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도 한껏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캐리어를 끄는 아버지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도 가벼워서 쳐다보는 저도 무척 신이 났고요. 그러고 보면 공항이라는 곳은 참 신비롭습니다. 비행기, 입꼬리, 컴컴한 영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라면 최적의 장소랄까요? 아버지 밝은 얼굴을 보니 온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습니다. 로켓처럼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삿포로 시내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5시였습니다. 생각보다 북쪽의 북쪽에 위치한 곳이라 이미 해는 지고 있었고요. 아직 초겨울이니 기대했던 것처럼 눈이 쌓여있지는 않았지만 두꺼운 패딩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바람은 꽤 매서웠습니다. 낮에 내린 진눈깨비로 축축했을 바닥은 저녁이 되어 얼고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빙판길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습니다. 세 블록 밖에 있던 호텔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아버지는 두어 번 휘청거릴 뻔한 저를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행여라도 삿포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지도를 볼 때 블록으로 거리를 가늠해보세요. 삿포로는 바둑판식 배열로 건설된 도시라 '블록 외우기'는 길 찾기에 한결 수월한 방법입니다. 동쪽으로 두 칸, 서쪽으로 한 칸, 다시 동으로 세 칸….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동서남북에 숫자만 붙여주면 늘 목적지에 닿을 수 있습니다. 양고기구이 가게도, 일본에 가면 꼭 가야 한다던 유명한 편의점도, 아버지와 꼭 잔을 부딪치고 싶었던 조용한 술집까지도요. 이 방법에 익숙해지다 보면 여행이 끝났을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만 보면 관계에도 규칙이나 배열이 보일 때가 있더라고요.



예전에는 아버지와 마주치기만 하면 왜 그렇게 다투기 바빴는지 의문입니다. 다가서는 법도 모르고 좋은 말도 해주지 못하고... (유치한 비유를 들어보자면 우리 감정이, 마음이, 인생이 삿포로처럼 딱딱 떨어지게 설계된 마을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와 보니 두고두고 이 여행이 위로가 됩니다. 두리번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게 처음이라서요. 행여나 그가 헤매게 되면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를 더 사랑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눈이 펑펑 쏟아지는 삿포로에 아버지를 모셔가고 싶습니다. 나만큼 당신도 눈 속에 파묻고 올 게 많은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생각해보면 길을 걸으며, 술을 마시며 나눈 대화가 백 마디나 될까 싶을만큼 조용히 걸었던 우리. 삿포로에서 돌아온 날 아버지는 가족이 모인 채팅방에 문자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 '12월의 약속: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말 자주 하기. 꼭 꼭 하기'



전염병이 잠잠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꼭 삿포로엘 가보시길 권합니다.
혼자 서나 둘이 서나 좋은 풍경임에는 틀림 없는 곳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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