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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Nov 10. 2024

쿠팡에서 사람이 죽고 있대요

점심시간, 평화를 깨트린 한마디

쿠팡에서 올해만 네댓 명이 죽었대요.


라고 말하지 말아야 했을까? 화기애애하던 점심식사 자리에 툭 던진 말이었다. 비장한 말투는 아니라 분위기가 싸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눈치 보이지 않는 말은 아니었다.


물론 맥락 없지는 않았다. 모 브랜드 마파두부 소스가 맛있다며 쿠팡에서 함께 주문해 나눠 갖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던 차. 쿠팡을 끊기로 하고 로켓와우를 탈퇴한 지 사나흘 되는 날이었기에 아무 말 않고 있었다. 주문하기로 한 분이 마침 맞은편에 앉은 내게도 물었다. 하나 사실래요? 자연스런 물음에 나는 답했다. 아니요, 저 쿠팡 이제 안 써서요. 말을 뱉자마자, 왜요? 라는 말이 돌아올 거라고 직감했고, 그렇게 되었다. 생각이 다듬어지지도 않은 채로 쿠팡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 되게 죄책감 들게 만드시네요. 웃으며 돌아온 말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만든 것 같아 괜히 미안하기도 했다.


그 말을 하지 말아야 했을까? 그럴 순 없었다. 그건 내가 불의를 못 참는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사회 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리스도인 출신(지금은 교회를 안 나가니까 출신이라고 썼다)이어서도 아니고, 쿠팡에서 이상한 물건을 받아서도 아니고… 지나가다 본 다큐 하나 때문이었다. 에피소드 제목은 '죽어도 7시까지 도착 보장'. 퍽 자극적이지만 말 그대로였다. '죽어도' 새벽까지 배송을 완료하기 위해 달리는 노동자들과 “개처럼 뛰고 있”어도 쏟아지는 “최대한 빠르게 해 달라”는 메시지… 다큐를 보며 내가 그 구조에 8000원짜리 멤버십으로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불쑥 든 죄책은 그 기여가 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았기 때문일 거다.


고 정슬기씨의 카카오톡 메시지 일부.


쿠팡 없어도 괜찮아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결단코 아니다. 가성비를 최고로 치는 내게 쿠팡은 최저가를 항상 보장해 주었고,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면 백이면 백 쿠팡에서 주문했다. 집에서 7~8분 거리 다이소에 가면 있을 물건도 웃돈을 주고 쿠팡에서 사곤 했으니 객단가는 높지 않아도 열렬한 고객이었을 것이다. ‘이번 달 이 정도 금액의 혜택을 보았다’고 오는 알림에는 항상 몇만 원이 적혀 있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누구 목숨값이었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든 뒤에는 사망했다는 노동자들이 어느 물류센터에서 일했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지난달 산 내 물건이 거기서 오지는 않았을지 싶어서.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완전히 무결해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이렇게라도 부끄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던가 보다.


쿠팡와우를 해지하려고 하니 한 달을 무료로 해 주겠다며 나를 유혹한다. 고작 몇천 원에 넘어갈 맘이었으면 해지하기를 누르지도 않았지. 마음을 굳게 먹고 해지 이유에 이렇게 썼다. “올해만 다섯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회사 고객으로 남기가 부끄러워 해지합니다.” 고작 몇천 원짜리 고객의 메시지, 책임 있는 사람에게까지 닿지도 않을 메시지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 말도, 그냥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앞뒤 상황을 생각하면 후회되지만 그건 나의 다짐을 위해서 한 말이기도 했다.


학부 시절 들었던 커뮤니케이션 이론 수업에서는 (지금 생각해 보면 불편한 축에도 못 끼지만) 불편한 이야기가 자주 오갔다. 기숙사 청소 노동자들의 열악한(정확하게는 불법인) 휴식 환경, 근로계약에 포함되지도 않은 밭농사를 짓게 한다 따위의 놀라운 이야기. 그러면서 교수님은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 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앞뒤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말만은 마음에 남았다.


졸업 직전 학기였을 것이다. 임금 인상 투쟁 중인 청소 노동자들을 위한 음악회를 한다며 와서 노래 한 곡 해달라는 후배 요청에 한참을 고민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일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마땅히 없는 것 같아서, 기타 하나 달랑 들고 학생회관 귀퉁이를 막아선 채로 곽진언의 ‘후회’라는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는 가사가 대부분 중년 여성인 청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때부터 연습이 되었던 걸까. 무참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을지 스스로에게 꼭 한 번씩 물어보게 되었다. 여전히 모른 체할 때가 더 많고 그 모른 척이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 낫기도 하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냥, 모른 체하는 게 못난 일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는 법이다. 학생회관 앞에 와서 노래 한 곡 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던 후배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 메시지 하나가 나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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