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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하 Jul 12. 2020

나는야 수포자

숫자가 제일 무서웠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수학 교과서에서 제일 싫어하던 질문입니다. 단순 곱셈 문제를 받아 든 8살은 이미 외워둔 구구단을 이용해 빠르게 답을 찾았고 뻔한 이유를 묻는 질문이 귀찮았습니다. 나의 수학익힘책은 결국 반도 다 풀리지 못하고 동생에게 넘겨졌습니다. 솔직히 그 문제는 너무 어려웠지 뭐예요. 다섯 마리 강아지의 다리 개수가 스무 개라는 것을 곱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줄 몰랐으니까. 하늘이 두 쪽 나도 사, 오는 이십이었으니까.


학원에서 방정식을 처음 배울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합니다. 학교 친구들이 숫자 일일이 대입해가며 애쓸 때, 나는 x와 y로 식을 만들고 금세 답을 찾으니 아무도 모르는 지름길을 걷는 기분이었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새로운 공식을 탐색했습니다. 자식이 공부에 흥미를 찾은 것 같다며 부모님도 즐거워하시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요. 그때부터 나의 학원 강행군은 시작되었어요.


13살은 학원에서 6학년이 아닌 예비 중1로 불립니다. 칠판에는 드 모르간의 법칙 예제 풀이가 한창입니다. 이제 곧 중학생이니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어도, 그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문제 유형별로 필요한 공식을 외우고 있자니 구구단을 외던 때가 새삼 떠오릅니다. 단원 평가 점수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나는 수학에 소질이 없구나.' 미처 암기하지 못한 유형이 시험에 나오는 날이면 창문에도 시험지에도 주룩주룩 비가 내렸습니다. 나만 있던 지름길은 어느새 꽉 막힌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학은 평균 깎아먹는 괴물로 전락하고 있었지요.


예비 고1은 삼각함수를 공부하다 문득 숫자가 두려워졌습니다. 두, 세 학기씩 앞서가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는 모순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미적분을 만난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결국 수포자가 되고 말았어요. 수학의 정석 수 I과 수 II는 신줏단지처럼 새 것인 채로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답니다.


지박령(地縛靈)


가만히 생각합니다. 상처만 남은 수학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이과적 재능은 부족하지만 분명 수학이 재미있다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학원에서 방정식을 배웠을 때, 다시 말해 남들이 모르는 것을 먼저 알았을 때였지요. 따지고 보면 그것은 부정입니다. 아직 배우지 않은 지식을 써가며 문제를 푸는 것. 간단한 원리의 근거조차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정답을 내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즐겁다 느낀 것은 어쩌면 수학이라는 학문이 아니라 계산기만으로도 가능한 단순 연산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평소 영상 촬영에 관심이 있던 나는 고등학교 방송부 경험을 살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원하던 영상 공부만 실컷 할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수학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학문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반쯤 포기했던 미적분을 언론 통계학을 배우며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취재한 정보를 통계 자료로 가공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언론인에게 통계학적 소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가짐이었어요. 일부러 조금 돌아가며 더 많이 익히고자 다짐했습니다. 준비하는 것과 먼저 끝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요.


복잡한 수식 대신에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수치로 공부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실제 지역별 자살률과 학력이나 월수입 같은 요인들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해보면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통상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실제로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과정은 수학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습니다. 수학과 나를 가르던 벽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거 몰라도 사는데 아무 문제없어!'


학창 시절 수학과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지요. 백번 동의합니다. 한번 배운 것이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뿐더러 실생활에서 사칙연산 외에는 잘 쓰이지 않지요. 분명한 것은, 의사소통에 있어 숫자는 매우 큰 힘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상대를 설득할 때, 잘못된 정보에 반박할 때도 정확한 수치를 바탕으로 펼치는 논리는 강력하고 효과적입니다. 특히,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온라인에서 올바른 통계적 근거를 가진 보도를 분별하려면 비판적 해석 능력이 필요하겠지요. 국어에 여러 갈래가 있듯 수학도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 강점으로 살려보는 것도 유익할 듯합니다.


그래서 이제 수학이 좋아졌냐고요? 천만에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쭉 수학은 나에게 반갑지만은 않은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한 힌트만 남기는 학문은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어 내 마음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고양이 같다고나 할까요? 아주 아주 오래 사셔서 무표정한 어르신 고양이는 오늘도 창문 두드리는 장맛비에 긴 함수(한숨)를 뱉으십니다.


이제는 어려워도 지름길을 찾지 않습니다. 두름길로 빙 돌아가는 것이 더 즐거울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지름길이라고 꼭 빠른 것만도 아니니까요. 벌써 다 큰 척을 하는 나는 수학책에서 끊임없이 묻던 '왜?'라는 질문에 언제쯤 제대로 답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꼭 수학이 아니라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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