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 걸까
‘할머니’라는 단어를 읊으면 여러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른다. 다정함, 따뜻함, 약하고 초라함, 어떤 종류의 양심도 떠오른다. 할머니는 우리의 시대에 항상 존재하는 동시에 다양한 계층과 역할과 이미지를 담당한다. 여성이 나이가 들면 으레 할머니가 될 뿐인데 여러 이미지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건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건 내가 지금껏 살면서 만난 수많은 할머니의 이미지가 내면에 남아있고, 그 다양한 모습이 내게 무언가를 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떤 할머니가 되고 싶은지 상상할 단계에 이르는 듯싶다.
<어제 꾼 꿈>에서는 마녀수프를 함께 만드는 할머니가 좋았다. <흑설탕 캔디>는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했다. 뜻대로 펼치지 못한 삶이지만 끝내 자신의 감정을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할머니가 좋았다. <선베드>는 적당히 재미있었고, <위대한 유산>은 뭔가 싶었다. <11월행>은 엄마 둘 딸 둘의 서사와 흔히 말하는 내리사랑의 편안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디스토피아였다.
다 읽고 나니 나는 역시 마녀수프를 함께 만들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에 닿고 내 안의 소중함을 잃지 않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에도 닿는다.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이 결국 할머니가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떤 할머니가 된다는 건 어떻게 살았는가의 함축인데,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지난 40년은 어땠나 앉은자리에서 잠깐 웅크리는 시간을 가졌다.
백석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마켓이 있는데 작년부터 종종 다녔다. 그곳에서 우연히 수정과 하나를 시음했는데 너무 익숙한 맛이라 깜짝 놀랐다. 우리 외할머니가 만든 수정과 맛과 아주 같았다. 수정과 맛이 다 수정과 맛이고, 식혜 맛이 다 식혜 맛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할 말이 없지만. 내겐 분별이 확실한 맛이다. 할머니의 수정과와 식혜는 대를 이어 나의 엄마와 외숙모에게도 이어졌지만 자손들이 만든 수정과와 식혜는 미묘하게 묵직함이 덜했다.
인천항 앞에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생선을 파셨던 나의 외할머니는 명절에도 장사를 나가셨다. 새벽에 해가 뜨기도 전에 버스 첫 차를 타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떼오고 하루 장사를 하시고 저녁 6시 무렵 집에 돌아오셨는데 명절에는 더 늦게 8시경에나 돌아오셨다.
온종일 난방장치 없이 뻥 뚫린 시장에서 찬바람 숱하게 맞으며 장사를 한 할머니는 저녁을 간단히 드신 뒤 수정과와 식혜를 만드셨다. 그렇게 고되게 일하고 오셨으면서도 그게 본인의 책무라는 듯이, 본인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삼촌들이 결혼을 하고 나의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와 수정과와 명절 음식을 만들어도 할머니는 항상 음식을 살펴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셨다. 그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키가 작은 할머니가 주방에 서서 음식을 살펴보고 수정과를 만드는 뒷모습을 마룻바닥에 발랑 누워 바라보던 시선이 여전히 내 눈에 맺혀있다.
우연히 들르던 마켓에서 그 수정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라 몇 팩을 구입했다. 그리고 점포에서 황급히 벗어나며 주접스럽게 울었다. 다시는 못 만날 우리 할머니의 수정과 맛을 조우하니 너무 당황스럽고 그리워서 그랬다. 마켓에 몇 번 다니다가 이제는 셀러에게 직접 카톡으로 여러 병 주문하곤 한다. 마침 요번 설에는 잔뜩 사서 냉동실에 얼렸다가 가족들과 나눠 마셨다. 꽁꽁 얼었던 수정과가 살살 녹아 살얼음이 졌을 때 내 마음의 어떤 각 잡힌 부분이 슬슬 풀어진 기분도 들고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