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물일기, 진고로호
진고로호 작가의 <미물일기>를 읽었다. 우리 곁의 작은 존재들, 미물을 관찰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따뜻한 책이었다. 존재 중에는 작거나 여리다는 이유만으로 귀여움을 받는 존재들이 있다. 반대로 무시당하기도 한다. 그런 존재들을 떠올려보다 오래전 집에 있던 감나무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감나무집이었다. 단독주택들이 모여있던 동네에서 으레 그 집의 메인 나무가 집의 이름이었다. 앞집은 대추나무집이었다. 물론 우리 집에도 대추나무는 있었다. 앞 집에 비해 대추나무가 작았을 뿐이다. 우리 집 앞마당 정면에 위로 옆으로 잘 뻗어 나 주인공의 역할을 맡은 게 감나무였기에 감나무집이 된 사연이다. 옆집은 은행나무집이었는데, 역시 우리 집에도 작은 은행나무가 있었다. 다시 말해 각 집을 대표하는 나무가 집의 이름을 맡는 격이다.
우리 집 감나무는 매년 단감을 주렁주렁 열었다. 그 덕에 늦가을마다 단감이 몇 소쿠리씩 나왔다. 이왕이면 대봉감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단감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단감을 먹지 않는다. 단감을 수확하면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우리 집 과일은 오직 단감이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지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해에 감나무에 병이 들었다. ‘응애벌레’라고 했다. 하얀 스티로폼 알갱이처럼 생긴 벌레가 감과 나무 잎사귀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빠는 약을 쳤다. 그런데 약을 치니 벌레만 퇴치된 게 아니라 감도 퇴치됐다. 덜 익은 감은 논개처럼 응애벌레를 안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단감 농사는 몇 해가 지나도록 실패였다. 모질게도 들러붙는 응애벌레는 겨울을 나고 다음 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3년쯤 그렇게 설익은 감들을 버렸을 때인가. 엄마가 감나무를 보며 짜증을 냈다.
“너 내년에도 감 안 주면 뽑아버릴 거야!”
감나무는 미동도 없었다. 속으로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감나무가 엄마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다음 해에는 응애벌레가 보이지 않았다. 몇 년간 약을 친 게 그제야 실력을 발휘한 건지 골칫덩이 벌레들이 모두 사라진 거였다.
그런데 벌레를 내쫓느라 기력이 쇠한 걸까? 감나무에 감이 열리지 않는 거다. 분명 엄마가 감 안 주면 뽑아버린다고 했는데…. 나와 언니들은 조용히 감나무의 운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모습이 포착됐다. 나무 저 위에 정말 딱 한 알, 단 하나의 감이 열려있는 거였다. 엄마가 감 안 주면 뽑아버린다고 으름장을 놔서인지 기를 쓰고 열매 하나를 맺은 모양이었다. 혹은 일부러 놀리려고 한 개만 맺었거나.
우리 가족은 모두 마당에 나와서 감나무를 보며 혀를 찼다. 감 안 주면 뽑아버린다고 했더니 진짜 딱 하나만 맺은 거냐고. 뭐 이런 감나무가 다 있냐고. 하지만 감을 안 준 건 아니라서 뽑진 않았다. 나무와 한 약속도 약속이다.
그 이후로는 감나무가 조금씩 체력을 회복해 다시 많은 감을 배출했다. 감나무집 막내딸인 나는 끝내 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응애벌레의 시련을 견디고 몸소 ‘I will be back’을 실천한 감나무는 좋아하게 됐다. 온몸을 쥐어뜯는 응애벌레와 사투를 벌이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감나무는 내가 살면서 만나는 역경을 뚫고 나갈 때마다 희미하게 떠오르곤 했다. 감나무도 버텨내는 삶, 미물이라면 미물인 나무도 회생하려 애쓰는 삶. 특히 건강이 쇠락한 올해는 돌아온 감나무가 자주 떠오르곤 했다.
주홍빛 단감 한 알을 자랑스레 맺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감나무, 다소 지친 모습이었지만 마당 주인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감나무.
나는 지금 무엇을 맺고 있나. 주렁주렁 맺진 못해도 올망졸망 의미 있는 시간을 맺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딱따구리가 나무껍질을 부리로 망치질하며 이제 나무 쪼는 게 지겹다거나, 벌레 말고 딴 걸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다. 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집중한다. 완전하게 현재를 산다. 인간은 자주 지금에 머무르는 데 실패하고 어딘가를 떠돈다. 과거에 두고 온 더 많은 기회와 미래에 있을 더 많은 행복. 더 신나고 즐겁고 훌륭하고 값진 무언가를 찾아 현재를 자꾸 벗어난다.
내가 딱따구리였다면, 이 나무에 앉았다가 저 나무에 앉았다가, 나무를 쪼았다가 말았다가, 산만한 날갯짓으로 작은 구멍 하나 내지 못하고 배를 곯아 나무 밑으로 풀썩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인간이기에 집중하지 못해도 당장 생존에 치명적인 위협을 받지 않았다. 대신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헛헛함에 속이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