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막뚱이 Oct 31. 2023

오손조손 여행기-전주여행 마무리

첫 여행의 시작과 끝

추억의 힘


전주 여행은 1박 2일이었다. 하지만 야심 찬 첫 가족여행이니만큼 최근 갔던 2박 3일 여수 일정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걸 하고 왔다. 많은 걸 해보겠다는 욕심에서 가끔 삐그덕 대는 불협화음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처음은 늘 그런 것 같다. 완벽한 처음은 어렵다. 처음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맞는 걸 찾고, 그때그때 맞춰오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처음을 망쳤다고 생각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 경험도 다음 경험을 위한 받침이 될 뿐만 아니라 엉성하면 엉성한 대로 기억 남는다. 우리에겐 추억보정과 망각이라는 인류의 축복이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걸 보고, 그런 순간의 장면들이 삶을 더 빛나게 해 준다.


“할머니와 탈춤 보기”


둘째 날도 한옥 마을로 향했고, 이제는 조금 더 당당하게 휠체어를 빌렸고,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난 곳에서 칼국수를 먹고, 전날 우연히 알게 되어 예매해 둔 국악 공연을 보러 공연장으로 향했다. 전주가 부러워졌던 순간 중 하나였다. 전주는 양반 도시일 뿐만 아니라 국악의 도시기도 했다. 나는 사실 국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께서 Tv로 판소리 같은 전통 공연을 보시는 걸 (뉴스를 재밌어하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해 못 했던 내가 대학에 들어가 국악동아리에서 활동하고, 국악 수업도 듣고, 종묘제례악을 보러 가기도 하고, 국립국악원에서 공연 보고, 민요도 부르고, 부채춤도 추기도 했다. (나열하니 거창해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짧은 이벤트들이었다…) 할머니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볼 일이 거의 없으셨기 때문에, 트로트 가수 티켓팅 관련 뉴스들을 볼 때면 할머니도 으레 생각났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전주 여행하던 시기가 마침 국악 관련 행사 주간이었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하고 미끼를 덥석 물었다. 10월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리쬐는 뙤약볕에 익어가면서 본 공연, 닭은 매우 지루해했지만, 할머니는 탈춤을 즐겼다. 태양이 뜨거운 것만 빼면 앉아서 볼 수 있었고, 웃음 포인트들이 있었다. 공연을 보고, 다시 기차 타고 남원에 들렀다.



가장 필요한 순간, 한 줄기 친절의 힘


남원은 춘향이의 고장. 하지만, 남원에 내리자마자 비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고, 닭과 나는 별 거 아닌 이유로 다퉜고, 먹구름과 추적추적한 비처럼 분위기는 엉망진창. 남원 경유의 목적지였던 광한루에 어찌어찌 들어가 휠체어도 대여했지만, 할머니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셔서 포기했다. 여행하면서 조금씩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하던, 뭔가 글로 남기기 부끄럽고 껄끄러운 순간이었지만, 사실 그때는 처음 여행지에서의 호의를 깊게 느꼈던 순간이기도 하다. 전주에서도 다들 대체로 친절하셨지만,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차올랐을 때 받은 친절은 더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직원분께서 어떤 도움을 주셨고, 무엇보다 할머니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해주셔서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 기껏 여행 잘 마치고, 돌아가기 직전 각자의 이유로 살얼음판이었던 우리 가족에게 따뜻함을 나눠주셨다.



필요한 건 욕심 내려놓기와 여유


결국 광한루는 포기하고, 돼지 갈빗집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카페에 갔다. 비가 계속 내려서 뜨겁기까지 했던 가을날이 급랭했지만, 옛날 초가집 같은 아늑한 카페에서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고, 마음도 녹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할머니와의 여행에서 필요한 것은 이런 여유였다는 것을. 모든 걸 내 욕심대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내가 좋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답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여행에서는 늘 변수가 발생하고, 변수가 때로는 내 자신이 되기도 한다. 기분은 소용돌이와 같이서 한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계속 나선을 따라 끝없이 지하로 낙하하는데, 잠깐 의식적으로라도 멈출 필요가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여행 추억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강렬하게 기억 남는다. 사실 가이드의 역할을 맡은 자로서 마음 놓고 즐길 수는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잘 다녀왔고, 감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은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추억 여행으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할머니께서 그 여행을 미안함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것. 할머니는 아직도 종종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다. 함께 여행하면 애들이 고생이라고, 휠체어를 끌고 반납하느라 막뚱이가 너무 고생이 많았다고. 휠체어를 가져오고 반납하고, 그 과정이 내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그리고 깨달았다. 서로 옥신각신했던 건 서로 미안해서였다는 걸. 미안함의 서투른 표현이었다는 걸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우여곡절의 완벽하지 않은 첫 여행이 있었기에, 다음 여행은 채울 건 채우고, 비울 건 비워가며 계속 지속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모험과도 같았던 첫 여행은 우리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여행의 물꼬였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