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을 기억하기 위한, 여정을 기록하기 위한 글을 써본 적이 없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번 네르하, 말라가 여행에 대해 적어보려 하는 것은 그날들의 경험들이 지금까지의 어떤 여행과 다른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했던 한국행, 뉴욕 여행이 불가피하게 틀어지면서, 어쩌면 올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여행을 계획해야 했다. 그러던 중 나나 짝꿍이나, 모두 독일에 오고 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기로 정했다. 스페인 남부를 찾다 보니, 말라가(Málaga)라는 휴양도시를 먼저 알게 되었으나, 그 주변에 일반적으로는 하루 당일치기로 다녀오곤 한다는 네르하(Nerja)라는 도시를 찾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는 너무 북적이거나, 도시로 다녀오고 싶지 않았다. 바로 지난 여행이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철저히 휴양, 좀 더 나아가 요양이었다. 그래서 일정상 조금은 한산하다는 네르하를 더 길게, 보다 도시인 말라가를 짧게 잡고 계획했다.
아무리 날씨가 따뜻하다는 스페인 남부더라도, 10월 말인 지금 바다 수영은 거의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떻게든 물속에는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숙소는 모두 작더라도 수영장이 함께 있는 곳으로 찾았다. 다행히 휴양지라 그런지, 날이 더운 지방이라 그런지 수영장이 딸린 숙소가 꽤나 많았다. 특히 네르하 숙소는 수영장도 꽤나 컸다. 여기서 함정은, 사실 우리는 둘 다 수영을 못한다. 기껏해야 물에 떠있는 정도기에 사실 그렇게 넓을 필요도 없었고, 따뜻한 햇살 아래에 물속에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10월 말이라고 해도 스페인의 햇살은, 정말 스페인다웠다. 뜨거울 때는 지금이 여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고, 독일에서라면 이미 해가 져있을 시간에도 밝게 떠있었다.
햇살 아래 있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햇살이 정말 소중하고, 살만하다는 생각이 한 편, 또 여름의 햇살은 더 강할 텐데 정말 죽을 맛이겠다는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드는 햇살이었다. 나는 열이 많고, 더위도 많이 타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완전 여름이기보다, 지금이 딱 여행하기 좋은 시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기대되는 것 중에 하나가 '해산물'이었다. 독일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맛보기 위해서는 품을 들이든, 돈을 들이든 해야 했다. 여행을 가서 먹어온 것 중 해산물이 아니었던 것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마지막 날에는 '오늘은 고기를 좀 먹을까?'하고 고기를 먹고 올 정도였으니까.
또 우리는 정말 술을 못하기도 하고, 못하다 보니 잘 마시지도 않는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면 비웃을 만큼이긴 하지만 최근 1년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기껏해야 와인에 레몬 환타를 섞은 '띤또 데 베라노(Tinto de Verano)'를 매 끼니마다 한 잔씩 했던 거였지만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방탕'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다. 이번 여행에서는 바다를 눈에 담고, 소리를 듣고, 몸으로 부딪히고, 마음으로 다시 담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도 바닷가에서의 기억이었다. 여행 중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다.
코시국으로 인해 비행기는 거의 2~3년 만에 타는 터라, 공항에서부터 나는 얼떨떨했다. 하늘길 여행이 처음인 사람처럼 모든 게 헷갈리고, 버벅거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공항에 있었고, 추가적으로 백신, PCR 테스트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인지 보통 때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항공사 온라인 체크인을 하며 자리는 랜덤으로 선택했는데, 우리 둘의 자리는 떨어져 있었다. 물론 추가 요금을 내면 붙어 앉을 수 있었지만, 그건 아까운 것 같다며 (이상하게 먹을 때는 돈을 거의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이런 자잘한 비용은 아까운 것 같다. 구독료랑 같은 이치인가.) 3시간 정도의 비행 동안 떨어져 앉아있기로 했다.
두 줄 정도 떨어져 있어, 내가 돌아보면 짝꿍의 얼굴이 보였고 출발 전에 입모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하곤 했는데, 옆자리 남자분이 출발 직전 나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영어 할 줄 아세요?"
나는 긴장했다. 영어를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했어도 언제나 회화는 내 뇌를 복잡하게 만든다.
"아, 네. 조금요."
"괜찮으면 여기 창가 자리에 아무도 안 앉을 것 같은데, 내가 저기로 갈게요. 여자 친구랑 같이 앉을래요?"
"아! 그럼 정말 고맙죠"
남자분은 자리를 옮겨줬고, 나는 그 남자분 자리로 짝꿍은 내 자리에 앉혔다. 럭키. 여행 시작부터 그분의 배려로 기분이 좋았다. 스페인 말라가 공항에 도착했고, 내리기 전에도 나와 짝꿍은 다시 한번 그 남자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내렸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행인데 따로 앉았나 보네'라고 인지하고 '아쉽겠다'라고 생각까지는 누구도 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영어를 못할 수 도 있는 내게 말을 걸고, 혹시 괜찮으면 내가 자리를 옮겨줄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 본인에게는 어떠한 이득도 없는 행동이었다. 단순히 타인을 위한 행동이었을 뿐. 다시 한번 그분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본다.
코로나로 인해 스페인 입국 시에 필요한 백신 등의 건강 정보, 나의 개인정보 등을 미리 앱으로 입력해 QR코드를 받아야 했고 짝꿍 덕에 미리 알 수 있어 출반 전부터 준비해두었다. 꽤 긴 줄을 서서 QR코드 체크까지 마치고 짐을 찾아 공항을 나왔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마중 나온 건 따뜻한 기온, 뜨거운 햇살, 그리고 야자수였다. 우린 스페인 남부, 말라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