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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석이 Apr 26. 2024

24.04.26 자살

가진 게 나 밖에 없어서요.

자살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등 떠밀리는 날이 있듯이 나도 역시 그랬고 내가 서있는 곳이 낭떠러지 혹은 어딘가의 경계 쯤이었을 뿐이었다.


#1.

성지가 한국일보의 애도 시리즈 중 한 꼭지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성수소자 자살 사별자분의 인터뷰였다. 평소였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글을 찬찬히 활자에 눈을 꾹꾹 맞춰가면서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그의 추모 편지까지도. 그는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했다. 죽지 않고 본인 안에 남은 그 사람을 살려야겠다면서.

기자님은 그 마음이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했고, 나는 그 마음이 노래구절 처럼 처연하게 초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짐하기까지 걸렸을 시간을 나는 절대로 가늠할 수 없겠지만, 그 다짐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느꼈다.


#2.

나의 자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비록 번번히 실패했고, 결국 그때는 상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상상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지금 글을 쓰고 있게 되어버렸지만. 나의 삶에서 자살이라는 키워드가 여전히 유효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당장 죽고싶다던지 자살 사고가 증상으로 남아 있다던지 류의 이야기보다도, 내가 보냈던 그 기로의 시간들이 남아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그럼에도 여전히 여러가지 환경과 상황에서 기로에 서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외줄타기든 혹은 벼랑끝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버티기든 어떤 비유적 표현이 지금 나의 상황에 맞는 표현일지 분명하게 알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분명한 건 그런 상황에 여전히 내가 불안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살보다도 계속해서 내일을 생각하는 것이 더 두렵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를 다짐했을 때 들었던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그냥 달래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 또 분한 마음이 들고 만다.


#3.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타의에 의해 내 삶이 결정지어지는 것에 대한 환멸을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자의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각자에게 얼마나 큰 일인지 잘 알 것이라고도.


나 역시 그렇게 믿고 말하면서 사실 반려견의 생이 끝나면, 반려인의 생이 끝나면, 하고 가정을 세우며 내 생의 유효기간을 타의에 맡겨두고 있었다. 계속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살아갈 이유를 반복적으로 찾는게 지긋지긋해졌고 이유같은 건 없이 그냥 살고 싶어졌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도 살아있으니까 그냥 살고 싶어졌다. 여전히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 경계에 서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있지만, 그것마저도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죽는 것만은 떠밀려서 죽고 싶지 않아졌다. 발톱이 빠지는 한이 있어도 이 절벽에서 버텨야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이 외줄에서 춤을 춰버려야지.


나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기를 다짐했다. 더 이상 떠밀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나에게 사는 건 수단이자 곧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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